도양성(陶良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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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가한 명나라의 관료.

개설

도양성의 자는 이순(以循), 호는 양오(養吾)로 처주(處州)의 급운(給雲: 현 절강 진운현) 사람이다. 생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와 서에 통달하고 주도면밀한 데다 경륜이 있어 태학의 학생으로서 남창부통판(南昌府通判)으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서 원병을 파견할 때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을 따라 조선에 왔고, 정유재란 때는 병부 상서 형개(邢玠)가 그를 영평부통판(永平府通判)으로 임명하여 군량을 주관하게 할 것을 요청하여 다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전쟁 후 명나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4품을 더하여 조열대부(朝列大夫)에 봉하였다.

가계

도양성의 아들 학기(學夔)·기고(起翱)·수국(壽國)은 양성을 따라 조선에 와서 아버지를 보좌하였는데 일본군을 수십 명 사살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귀국 후 그 아들들은 모두 처주위(處州衛)의 세습 무직(武職)을 받았다.

활동 사항

1593년 조선에 들어와 왜구에 관한 계책과 평양 등의 전투에 관한 계책을 내어 송응창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숭례문 밖 도저동(桃楮洞) 산기슭에 있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의 비기(碑記)를 지었으며 조선의 국방강화책으로써 전투에 공을 세운 자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는 안을 올리기도 했다(『선조실록』 33년 11월 1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吳錫鑫, 「處州人物志(五)」, 『麗水師專學報』, 社會科學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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