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麻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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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왔던 명나라 무장.

개설

산서성(山西省) 대동우위(大同右衛) 사람이다. 회족(回族) 출신으로 명대에 무장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정 연간에 종군하여 몽골의 알탄 칸([阿勒坦汗], Altan Khan)의 남하를 막는 데 공을 세웠다. 만력 연간에는 영하(寧夏)·대동(大同)의 총병관을 지냈다. 1597년 제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전투에 임하였다. 본국에 돌아가 우도독(右都督)으로 승진하였다. 1610년 요동의 군문을 통솔하였으나 2년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일생 동안 세운 전공이 매우 많았으며 이성량(李成梁)과 함께 이름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동이서마(東李西麻)’라고 일컫기도 했다.

가계

부친은 대동(大同)의 참장(參將)을 지낸 마록(麻祿)이다.

활동 사항

마귀는 자주 전공을 세워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에 오르고 선부(宣府)의 유격(遊擊)에 임명되었다. 융경 연간 대동(大同) 신평보(新平堡)의 참장으로 활동하며 전공을 세웠다. 만력 초 대동총병에 임명되었고 1582년에 영하에서 총병을 지냈다. 1586년에 벼슬이 강등되어 변방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임용되어 몽골의 침입을 막는 데 공을 세웠다. 1592년 영하에서 발배(哱拜)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마귀를 부장(副將)으로 기용하였으며, 이에 마귀가 병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비왜총병(備倭總兵)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왔다. 정유재란 초기 한양에서 가까운 충청도 천안 인근의 직산현(稷山縣)에 진을 치고서 철기(鐵騎) 수만 명으로써 적의 선봉을 쳐서 일본군의 예봉을 격파했다. 당시 일본군이 울산으로 철수해 가자 경리(經理)양호(楊鎬)와 함께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울산의 전투에 참여하여 도산(島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포위한 지 열흘경에 왜군의 지원병이 이르면서 크게 패배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양호를 비롯하여 제독(提督)마귀 등은 울산 전투의 패배를 승리한 것처럼 명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정응태(丁應泰)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이후 명군은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였는데, 도독마귀는 양호를 따라 동로군을 이끌었다. 당시 마귀는 다시 영남으로 가서 울산을 주관하였는데 울산에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도산성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마귀는 1598년 9월 도산성을 포위하고 공략하였으나 마침 부산에서 일본의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주와 영천으로 군대를 후퇴시켰다(『선조실록』 31년 10월 20일). 1599년 본국으로 돌아가 우도독(右都督)으로 승진하였고 그 자손들까지 대대로 음봉(蔭封)을 받았다. 1610년 광녕총병(廣寧總兵)으로 요동의 군병을 다스렸다(『광해군일기』 2년 4월 17일). 뒤에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후에 만력제가 제사와 장례 비용을 지원해주었다.

학문과 사상

저술 및 작품

묘소

상훈 및 추모

참고문헌

  • 『난중일기(亂中日記)』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명사(明史)』
  • 『태평현지(太平縣志)』
  • 이민웅, 「조·명 연합함대의 형성과 노량해전 경과」,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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