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배(蘇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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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희제대 공부·예부·이부의 시랑을 지낸 관료.

개설

소배는 청 강희제(康熙帝)대 공부(工部)·예부(禮部)·이부(吏部)의 시랑(侍郞)을 지낸 수바이(subai)를 가리켰다. 청초의 대신으로 1664년 사망한 후, 근희(勤僖)라는 시호를 받은 구왈기야([瓜爾佳], Gūwalgiya]씨의 수바이와는 동명이인이었다.

활동 사항

수바이는 1669년 호과(戶科) 급사중(給事中)으로, 1679년에는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으로 재임하였고, 1674년에는 황제의 지시를 받고 반란을 일으킨 협서(陜西) 경략(經略)막락(莫洛)과 제독(提督)왕보신(王輔臣) 등의 표하군(標下軍)에게 가서 초무하였다. 1680년 강희제가 이부에 칙지를 내려 만주 육과(滿洲六科)와 만주 및 한군(漢軍)의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조사하여 계속해서 둘 사람과 혁직할 사람을 가려내도록 하였는데, 이때 이과급사중으로 있던 수바이는 유임(留任)의 대상으로 남았다. 수바이는 내각(內閣) 시독학사(侍讀學士)를 지내다가, 1681년 5월에는 도찰원(都察院)의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공부(工部)의 우시랑(右侍郎)으로 승진하였다.

이즈음에 대만(臺灣)을 지배하고 있던 정성공(鄭成功)의 손자 정극상(鄭克塽)이 청에 투항하여 사실상 청이 중원의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씨의 세력 가운데 일부가 해상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따금 연해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복건(福建) 지역의 군대는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1683년 7월 수바이는 강희제의 지시를 받고 복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군량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내려갔다. 수바이는 복건 일대에서 현지 관원들을 감독할 뿐만 아니라 대만에 가서 실태를 조사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내지로 옮겨 안정시키는 등의 일을 처리하였다. 강희제는 같은 해 12월 현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수바이를 예부의 우시랑으로 임명하였다.

이 소식은 청을 방문한 하지정사(賀至正使)조사석(趙師錫) 일행과 고부사(告訃使)이유(李濡) 일행이 각각 1684년 3월과 6월에 사행을 마치고 복명한 뒤에 보고하면서 조선에도 알려졌다(『숙종실록』 10년 3월 14일)(『숙종실록』 10년 6월 18일). 수바이는 1685년 1월 이부(吏部)의 우시랑으로 임명되었으나, 공부에서 근무할 때 효과적으로 비용을 절감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환수되었다.

참고문헌

  •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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