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충(陳愚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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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군.

개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조선에 파견되어 3,000여 명을 이끌고 전주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총병관(總兵官)양원(楊元)이 지키던 남원이 함락되자 진우충 역시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가계

선조는 남직예(南直隸) 서성(舒城) 사람이다. 그의 고조부인 곡가(穀加)가 섬서(陝西) 가주(葭州)로 이주하였다. 아들 자수(子秀)를 두었고 그 아들 봉(鳳)이 진우충의 조부이다. 봉은 관직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고 대동총병(大同總兵)으로 임직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의 직을 받았으나 전사하였다. 이 공로로 그의 조부는 포충(褒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아버지 수인(守仁) 역시 음직으로 무직에 올라 총병이 되었고 소용장군(昭勇將軍)에 봉해졌다. 형 진우문(陳愚聞)도 유격(遊擊)으로서 정유재란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597년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실패한 뒤 전쟁 재발이 우려되었다. 진우충은 유격으로서 연수병(延綬兵) 2,000명을 거느리고 전주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명나라의 마귀(麻貴)의 군대가 한양에 도달했으나, 일본군은 경주에 진입하였고 바다에서는 원균이 크게 패하여 한산도를 점령당하였으며 남원 역시 포위당하였다. 당시 남원을 지키던 명군 장수 양원은 형세가 불리함을 알고 전주에 있는 진우충에게 알렸으나 구원하지 않았다. 이후 양원이 남원을 잃고 패배하여 간신히 빠져나가자 진우충은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당시 진우충은 남원에서 벗어나서 공주(公州)에 주둔하였으나 1597년 9월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양원은 도주의 죄를 물어 참수당하였으나 진우충은 참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31년 9월 9일). 하지만 양원이 평양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우고도 남원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이유로 참수까지 당했는데, 오히려 진우충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여론이 좋지 않았다(『선조실록』 31년 10월 8일). 진우충은 남원이 포위되어 구원을 요청해 왔는데도 끝내 응하지 않았고 전주마저 도륙을 당하게 했기 때문에 경리가 탄핵하는 주문(奏文)을 올려 곤장 100대에 처해졌으나 참형은 면하고 충군되었다. 이후 그의 형 진우문이 가산을 팔아 진우충의 죄를 속죄하여 풀려났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사(明史)』
  •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 代鋒, 「榆林市出土明陳愚聞夫婦墓志考釋」, 『西部考古』, 西北大學文化遺產學院,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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