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楊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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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흠차경리조선군무(欽差經理朝鮮軍務)도찰원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使) 직책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관원.

개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은 양호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양호는 북상 중인 일본군을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대패시켜 서울을 보호하였다. 일본군을 추격하여 울산성을 포위하고 울산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일본의 구원군이 대거 도착하였기 때문에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아 고향인 하남(河南)으로 물러났다가 누르하치[奴爾哈赤]가 무순(撫順)을 함락시키자 다시 병부 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로 기용되었다. 이후 누르하치의 정벌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옥에 갇혔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활동 사항

1580년 진사가 되었고, 대리평사(大理評事)를 거쳐 산동참의(山東參議)가 되어 요해도(遼海道)를 방수(防守)하였다. 요동포정사로서 임진왜란의 강화 교섭 기간 중 실태를 조사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8년 9월 15일).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일이 정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군사와 군량을 확보하여 급변에 대비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은 중국에서는 병부 시랑(侍郞) 형개(邢玠)를 총독군문(總督軍門)으로, 요동포정사양호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제독(提督)마귀(麻貴)를 대장(大將)으로 삼아서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양호의 정식 관직은 흠차경리조선군무 도찰원우첨도어사였다. 양호는 계모의 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상을 미처 마치기 전에 임무에 복귀하여 조선으로 나오게 되었다(『선조실록』 30년 4월 9일)(『선조실록』 30년 5월 25일).

양호는 1597년 7월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으며, 왜적이 남원을 함락하고 북상하여 선봉이 경기에 가까워 서울을 위협한다는 보고를 받자 행군을 재촉하여 9월 3일 모화관(慕華館)에서 선조를 접견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3일). 마귀제독과 함께 남산에 올라 호령(號令)을 포고하였으며, 날래고 건장한 군사를 뽑아 왜적을 막게 하고, 기병 2천 명을 뽑아 뒤에서 돕게 하였다. 한편 양호는 선조가 물러나려는 뜻을 보이자, 이를 만류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5일)(『선조실록』 30년 9월 6일). 한편 9월 7일 조명연합군이 직산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일본군의 북진 기세를 꺾고, 일본군을 순천과 울산 등지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이에 양호는 총독형개에게 글을 보내 먼저 울산에 진을 친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쳐서 적의 한쪽을 끊고, 제독마귀에게 4만의 군사를 남하시켜 순천에 진을 친 소서행장(小西行長)을 공격하게 하였다. 양호는 직접 울산에 내려가 울산성 전투를 지휘하여 가등청정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지만 적의 후원군이 도착하여 조명연합군의 포위를 뚫자 경주로 물러나 재차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양호는 어사(御史)왕선안(汪先岸)으로부터 불충·불효에 추위탈정(推諉奪情)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으며, 남병(南兵)과 북병(北兵)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병으로부터 원망을 받았다(『선조실록』 31년 2월 17일)(『선조실록』 31년 6월 23일). 결국 평소 그와 사이가 좋지 않던 병부(兵部)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주문을 올려 울산성 전투의 전과를 과장하였다는 등 스무 가지의 죄를 논하면서 양호를 탄핵하였다(『선조수정실록』 31년 6월 1일)(『선조수정실록』 31년 9월 1일). 당시 명나라의 대신과 선비가 양호의 억울함을 진언하였고, 선조도 연달아 최천건(崔天健)과 이원익(李元翼) 등을 보내 변호하며, 그대로 머물러 일을 주관토록 요청하였지만, 1598년 여름 파직되어 본국으로 소환되고, 만세덕(萬世德)이 경리의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28일).

한편 조선의 양호에 대한 거듭된 변호는 양호를 탄핵한 정응태를 격노케 하였다. 정응태는 이에 앙심을 품고 조선이 옛날부터 일본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함께 군사를 일으켜 요하(遼河) 이동 지방을 탈취해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한다는 무고를 하기에 이르렀다(『선조수정실록』 31년 9월 1일).

양호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하남에 내려가 있다가, 누르하치가 무순(撫順)을 함락하자, 다시 기용되어 광녕도어사(廣寧都御史)가 되었으며, 이때 조선의 자강책을 힘껏 개진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4월 17일)(『광해군일기』 2년 8월 14일). 정응태의 탄핵으로 10여 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던 양호는 요광도어사(遼廣都御史)가 되어서 전일의 억울함을 풀려고 조선에 끼친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시문, 즉 유애시(遺愛詩) 및 3차에 걸쳐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는[辨誣] 주문(奏文)을 요구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4년 2월 5일).

이후 양호는 흠차경략요동등처군무(欽差經略遼東等處軍務) 병부 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가 되어 후금의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 파견을 요청하였고, 조선에 군병을 들여보내기를 재촉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19일)(『광해군일기』 10년 7월 29일). 이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삼아 1만여 명에 달하는 원병을 파견하였으나,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후금군에 패하였다. 명에서는 사르후 전투의 책임을 물어 양호를 옥에 가두었으며, 조선은 그를 위한 주본을 보내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4년 4월 20일)(『광해군일기』 14년 10월 1일).

상훈 및 추모

양호가 떠난 뒤 조선에서는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를 세웠고, 임진·정유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양호를 선무사(宣武詞)에 배향(配享)하고 그의 화상을 동지사를 통해 구해오게 하였다(『선조실록』 37년 7월 23일)(『선조수정실록』 37년 7월 1일). 선무사는 숭례문 안에 있었는데, 선조가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네 글자를 친히 써서 걸었다(『숙종실록』 29년 6월 18일).

양호의 진상(眞像)은 그가 도어사가 된 이후인 1610년에 구할 수 있었으며(『광해군일기』 2년 8월 28일), 살아 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에 봉안하였다. 또한 그해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를 세웠는데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김상용(金尙容)이 두전(頭篆)했으며, 지돈녕부사김현성(金玄成)이 글을 썼다. 그리고 모래재[沙峴] 너머에 별도의 송덕비와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양호거사비를 모화관 곁에 고쳐 세웠다(『광해군일기』 3년 8월 4일)(『광해군일기』 4년 6월 4일).

양호거사비는 1764년(영조 40) 왕이 선무사에 나아가 제향을 지낸 뒤 비의 훼손을 염려해 다시 7척(자(약 5.2m) 높이의 새로운 비를 선무사 앞뜰에 세우고, 먼저 모래재에 있던 거사비를 선무사로 옮겨오게 하였다. 또한 1835년(헌종 1) 화재로 비문이 훼손되자 호조 판서장지연(張止淵)이 옛 비문을 모각하자고 건의했고, 이에 지중추부사신재식(申在植)이 적고, 용양위 호군신위(申緯)가 써서 그해 8월에 다시 세웠다.

양호거사비는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1호이다.

참고문헌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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