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계광(戚繼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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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기효신서』를 저술한 명나라의 장수.

개설

척계광은 1544년 6월 부친으로부터 등주위지위첨사(登州衛指揮僉事)를 세습한 후 왜구를 방어하며 전공을 세우기 시작했다. 1556년 절강참장(浙江參將)에 임명되었다. 병사를 모집하여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여러 가지 병기들로 진형을 잘 갖추어, 여러 차례 왜구를 섬멸하였다. 절강과 민(閩) 지역의 왜구의 환난을 가라앉힌 공으로 거듭 승진하여 복건총병관(福建總兵官)까지 올랐다. 1568년에 계요총독(薊遼總督)담륜(譚綸)의 추천으로 계주(薊州)로 옮겨, 16년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방어시설을 증축하고 지역 상황에 맞게 군제를 개편하고 훈련을 강화했다.

활동 사항

척계광은 어려서 기개가 있었으며,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해 경서와 사서의 뜻에 통했다. 17세인 1544년 6월 부친의 관직을 계승하여 등주위지위첨사가 되었다. 척계광이 부임한 등주위는 좌군도독부(左軍都督府)에 소속된 산동도지휘사사(山東都指揮使司)의 예하부대인 비왜도사부(備倭都司府)에 속하였다.

척계광은 1548년 1월부터 병부의 계획에 따라, 북변 방어를 위해 부하들을 데리고 계문(薊門)에 도착했는데, 변경의 수비가 허술한 것을 보고 『비변답책(備邊答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1550년 9월 몽골의 알탄 칸이 북경을 포위한 경술(庚戌)의 변이 발생하자, 그는 기패(旗牌)를 총괄하여 9문(門)을 수비하면서 몽골군을 막을 수 있는 10여 가지의 방안을 상주했는데, 그 제안이 타당하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는 1553년 6월까지 5년 반 동안 매년 교대 병력을 인솔해 북변과 산동을 오가며, 계문을 진수하다가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로 승진하면서 산동에 있는 비왜도사부의 수장이 되었다. 맡은 임무는 왜구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부임한 척계광은 영오(營伍)와 위소(衛所)를 쇄신하면서 부대의 전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555년에 절강도사첨서(浙江都司僉書)에 임명되었고, 1556년에 호종헌(胡宗憲)의 추천을 받아 참장(參將)으로 보임되어, 영파(寧波)·소흥(紹興)·태주(台州) 3군의 부대를 관리하게 되었다. 광범위한 지역에 침입한 왜구 소탕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1557년에 왜구들이 악청(樂清)·서안(瑞安)·임해(臨海)를 공격하였을 때, 척계광은 도로가 막혀 돕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유가 분명한 탓인지 이때는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유대유(俞大猷)의 병력과 함께 잠항(岑港)에 있는 중국인 해적 왕직(汪直)의 남은 무리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한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왕직을 평정한 공이 있다고 다시 관직을 받았다. 태(台)·금(金)·엄(嚴)의 3군을 지키는 것이었다.

척계광은 절강에 있을 때, 위소의 군인들이 전투 연습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우직하지만 용맹한 금화(金華)와 의오(義烏) 지역의 사람 3천 명을 모집하여 때리고 치는 무기 사용법과 짧은 거리와 긴 거리에서 사용하는 무기를 번갈아 사용하는 사용법을 교육했다.

이 교육을 위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1560년 처음 간행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활과 화살, 봉(棒), 창(槍) 등의 무기에 대한 전면 개량과 남방의 왜구를 방어할 때 사용하던 등패(籐牌), 낭선(狼筅) 등의 개선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왜구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 원앙진(鴛鴦陳)이라는 진법을 고안해냈다. 그는 원앙진을 기본 전투의 대형으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고 공격과 방어의 양면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교육을 받아 조직한 부대는 어느 부대보다도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척가군(戚家軍)이라 불렸다. 왜가 절강(浙江)에서 3년 동안 떠나지 않고 땅을 갈라 차지할 듯이 하였는데, 명나라가 이기지 못하다가 척계광에 의해 1561년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이겼다고도 한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14일).

1563년 4월에는 부총병(副總兵)으로 평해린(平海隣)에서 왜구를 소탕했으며, 12월에는 복건총병관(福建總兵官)으로 승진하였다. 1564년에는 왜가 선유(仙遊)를 침범했을 때 크게 패배시켜, 복건의 왜구를 평정하였다. 그는 1555년부터 1566년까지 12년간에 걸쳐 절강, 복건, 광동 등지에서 1백여 회 이상의 왜구와의 전쟁을 연승으로 이끌며 왜구 소탕의 성과를 거두었다.

1568년에 계요총독담륜의 추천으로 계주로 옮겼다. 계주는 북방에서 북경(北京)이나 천진(天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1568년 5월에 도독동지총리계주·평주·보정삼진연병사(都督同知總理薊州·昌平·保定三鎮練兵事)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 주로 왜구를 상대로 전투를 하던 그가 이제는 북방족과의 전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6년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방어시설을 증축하고 지역 상황에 맞게 군제를 개편하고 훈련을 강화했다.

장거정(張居正)의 신임을 받아 좌도독(左都督)까지 올랐으나, 장거정이 1582년에 사망한 뒤 배척을 받아 그 이듬해 광동총병으로 옮겼다가 얼마 되지 않아 병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1587년에 사망하였다.

그에 대해서 선조대에 조헌(趙憲)은 성품이 공정하고 부지런하며 적을 물리쳤다고 하면서 그의 문집인 『지지당고(止止堂稿)』 등을 인쇄하길 요청하기도 하였으며(『선조실록』 8년 3월 16일), 임진왜란 중에는 척계광이 군사를 훈련시키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였던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달리도록 하였는데, 익숙해지면 점점 그 무게를 높여가는 방법을 택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려고 하였다(『선조실록』 26년 8월 22일). 아울러 그가 왜적을 막기 위해 저술한 『기효신서』가 주목을 받았다. 왜적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특히 내용이 자세한 왕세정(王世貞)본을 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선조실록』 26년 9월 25일).

저술 및 작품

『기효신서(紀效新書)』

『연병실기(練兵實記)』

『지지당집(止止堂集)』

참고문헌

  • (사)대한전통무학회, 『무예문헌자료집성』, 국립민속박물관, 2004.
  • 노영구, 「조선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홍을표, 「명 후기 척계광의 전법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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