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마(擺撥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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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파발참에서 긴급한 군사 정보 및 공문서를 전달하는 데 사용된 말.

개설

조선시대의 파발마(擺撥馬)는 병조에서 총괄하였으나, 각 도 지방의 205개 발참에서 파발마를 확보하는 일은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에는 기존의 통신 제도인 봉수제(烽燧制)와 역전제(驛傳制)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새로이 파발제를 도입하였다. 지역에 따라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 등 3개 노선을 두었으며, 전송 수단에 따라 기발(騎撥)과 보발(步撥)로 구분하였다. 파발마는 기발에 사용된 말로, 각 참(站)에 5필씩 배치되었다.

조선시대 파발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파발마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역(驛)에 역마를 보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역마의 경우 각 역에 지급된 마전(馬田)을 재정적 기반으로 하여 말을 확보했으나, 파발마는 해당 병영 및 주·현·군에서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듭되는 전란과 기강의 문란 등으로 파발군과 파발마의 수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발군을 세우는 입역(立役), 파발마를 세우는 입발마(立撥馬) 등을 백성에게 부담시키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군사 요충지로 알려진 충주에서도 일어났다. 당초 충주의 파발마는 체찰사이원익(李元翼)의 분부로 설치되었는데, 민간에서 돌아가며 포(布)를 내어 파발마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런데 1602년(선조 35)에 충주목사로 있던 성호선(成好善)의 실정(失政)으로 발군이 흩어지고 파발마를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겸4도도체찰사이덕형(李德馨)은 그 해결책으로 연로의 한인(閑人) 등으로 하여금 발군과 파발마를 세우도록 할 것을 비변사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충주목사를 파면하고 충주를 회복시켜 발군과 파발마를 세우도록 요청한 것은 수용되었다(『선조실록』 35년 8월 28일).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 그 후에도 이와 같은 폐해가 계속되었다. 또 지방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의 군관 및 군졸들이 파발마를 사사로운 일이나 급하지 않은 공문을 전달하는 데 함부로 사용하는 폐단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1628년(인조 20)에 비변사에서는, 각 참의 발장으로 하여금 파발마를 타고 가는 사람의 성명을 자세히 적어 매월 말 감영에 보고하게 하였다.

한편 병자호란 이후 파발마가 감소하자 조정에서는 파발마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먼저 평안도와 황해도는 중국 칙사의 왕래가 빈번한 까닭에 파발마가 많이 사용되어 그 수가 부족했는데, 그 부족분을 함경도와 강원도의 역마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함경도에서 40필, 강원도에서 20필 등 총 60필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부족해, 나중에는 충청도에 6필, 전라도에 7필, 경상도에 7필 등 20필을 추가로 배정하여 총 80필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비변사등록』 인조 16년 9월 7일 조에 의하면, 중앙에서 지방의 각 참에 말을 보내는 운반비가 많이 들어 부담이 되자, 인조 연간에는 말을 보내지 않고 말 값과 운반 비용을 합친 액수에 해당하는 1필당 무명 1동 2필씩을 내려 보내도록 하였다.

1632년(인조 24)에는 파발 비용으로 여러 병종의 군인에게 무명을 바치게 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파발마를 확보하게 하였다. 『비변사등록』 숙종 12년 10월 25일 조에 의하면, 1686년(숙종 12)에는 파발마를 목장 말로 보충하거나 대동미로 확보하도록 했는데, 심지어 함경도에서는 전결(田結)에 세를 부과하여 파발마를 보충하기도 하였다.

『비변사등록』 숙종 43년 12월 26일 조에 의하면, 1717년(숙종 43)에는 경기 7참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선혜청의 건의에 따라, 참에 배정된 5필의 파발마 중 1필은 말 대신 그 값으로 쌀 30두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돈을 발장의 삭료와 종이 및 등유 값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또 『비변사등록』 순조 3년 3월 23일 조에 의하면, 1803년(순조 3)에는 병안도병사신대영의 보고를 바탕으로, 쇠잔한 20개의 발참에 1,000냥을 나누어 지급하여 파발마를 보충하게 하였다.

조선후기 파발군의 신역은 고역인데다가 심지어 파발마를 세우는 책임까지 맡게 됨에 따라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특히 파발군은 그 역(役)의 대가로 삭료를 받아 복무하였는데, 생활이 곤궁하여 삭료를 담보로 채주(債主)에게 미리 돈을 빌려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할 경우 채주들은 월급날이 되면 빌려 준 돈을 강제로 환수해 갔기 때문에, 발군들은 생활 대책이 없어 유리 도산하여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1866년(고종 3)에 비변사에서는 채주가 함부로 삭료를 빼앗아 가는 것을 금지하여, 파발군이 직분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였다.

파발마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파발마의 부족 현상은 지속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서로(西路) 발참에 선전관유지홍을 파견하여 파발마의 마적(馬籍)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서로의 7개 발참 가운데 정수(定數)인 발장 1명, 발군 5명, 색리 1명, 말 5필을 채우고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으며 파발마가 1필도 없는 곳이 무려 3개소, 1필 있는 곳이 1개소로 나타났다. 이러한 실정은 서로만이 아니라 남·북 발참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이며, 파발마 확보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관서읍지(關西邑誌)』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상호, 「조선시대 파발제-군사통신제 발달」, 『韓國軍事史 13』, 경인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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