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훈사(表訓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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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강원도 회양군금강산에 위치한 절.

개설

강원도 회양군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 만폭동(萬瀑洞) 인근에 있다. 삼국시대인 6세기 말에 창건되어 7세기 후반 의상(義湘)의 문도들이 중창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금강산의 대표적 사찰로서 사세를 유지하였다. 조선 세종대 선교양종의 교종 18사 중 하나였고 세조의 원당으로서 조선후기에도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었다.

연원

598년(신라 진평왕 20) 관륵(觀勒)이 창건했다고 전하며, 675년(문무왕 15) 의상의 제자이자 화엄학자인 표훈(表訓), 신림(神琳) 등이 중창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 영종(英宗)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향로와 향합 등이 내려졌고 원 황실의 후원을 받아 각종 법회와 반승(飯僧) 행사가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금강산은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상주처로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는데, 표훈사의 본당인 반야보전(般若寶殿)에는 법기보살의 상을 안치하였다.

변천

태조대에는 천재지변이 발생하자 표훈사 등에서 법석을 설행하였다(『태조실록』 7년 8월 17일). 태종대인 1406년(태종 6)에는 불교 각 종파의 사찰 수와 토지, 노비의 수를 제한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을 합쳐 70사, 천태(天台)의 소자종(疏字宗)법사종(法事宗)을 합해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文宗)은 합하여 43사, 자은종(慈恩宗)은 36사, 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은 모두 30사, 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은 각각 10사를 지정하여 총 242개 사찰에 허용되는 전지와 노비 수를 정하였다. 이때 태조와 왕사 무학자초(無學自初)가 머물던 회암사(檜巖寺)는 예외로 하고 토지 100결과 노비 50구를 추가로 지급하였다. 금강산의 표훈사와 유점사(楡岾寺)도 회암사의 예에 의해 토지와 노비를 감액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1408년에는 명의 사신 황엄(黃儼) 등이 표훈사에 들러 공양 비용으로 견(絹) 30필을 냈다(『태종실록』 8년 5월 4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표훈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표훈사는 원래 보유하던 토지 210결에 9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300결이 되었고 거주 승려는 150명으로 정해졌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는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에 해당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강원도 회양의 표훈사는 교종 소속으로 전지 300결이 지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에도 명의 사신 창성(昌盛)과 백언(白彦)이 금강산에 유람할 때 표훈사에 머물면서 반승 의식을 행하였다(『세종실록』 9년 5월 21일). 세조대에는 왕이 직접 표훈사에 행차하였고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수륙회(水陸會)를 베풀게 하였는데, 이때 꽃비가 내리는 등의 상서로운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세조실록』 12년 3월 21일) (『세조실록』 12년 3월 29일). 조선후기 정조대에는 세조의 위패가 봉안된 표훈사 원당(願堂)이 홍수로 피해를 입자 국가에서 곡물을 지급하여 보수하였고 또한 공명승첩(空名僧帖) 250장을 발급하여 표훈사와 여주신륵사(神勒寺)의 중수를 도왔다(『정조실록』 20년 6월 10일) (『정조실록』 20년 8월 25일).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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