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과(蕩平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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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영조 48) 탕평책의 하나로 시행한 시험으로 정시의 일종.

개설

탕평책은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던 정책이었다. 탕평과는 1772년(영조 48) 8월 1일 영조가 탕평책을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생들이 당심(黨心)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행한 과거였다. 정시(庭試)로 마련되어 왕의 친림 하에 실시되었다. 문과에 3명을 뽑았으며, 무과도 함께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숙종대에 잦은 환국으로 인하여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해지고 당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로 인한 폐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영조는 노론·소론·남인·대북·소북 등의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영조가 몇십 년간 탕평을 하느라 고심하였음에도 당색은 해결되지 않았다. 탕평과를 설치한 것은 탕평책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탕평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탕평’이라는 이름을 빌려 과거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었다(『영조실록』 48년 8월 11일).

1772년 8월 1일 영조는 탕평과 설행을 명하였다.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에 친림하여 유생들을 시험하고 중일청(中一廳)에 나아가 무사들을 시험하였다(『영조실록』 48년 8월 1일). 시험문제는 어제로 부(賦)가 출제되었다. 시제는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탕탕(王道蕩蕩)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평평(王道平平)”이었다.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에 실려 있는 말로 탕평의 유래가 여기서 나왔다.

이때의 시험에서 임종주(任宗周)·남학문(南鶴聞)·서유방(徐有防) 3명을 뽑고 8월 3일에 숭정전에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실록에는 3명을 뽑았다고 되어 있으나 『국조문과방목』의 탕평정시방(蕩平庭試榜)에는 갑과 1명에 임종주, 을과 2명에 남학문·서유방 외에 병과에 김한로(金漢老) 등 8명을 뽑아 급제자는 총 11명이라고 하였다. 『일성록』에 의하면 8명은 은사(恩賜)로 직부(直赴)된 사람들이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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