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역과(討逆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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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반사건이나 역적을 토벌한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시행된 과거.

개설

토역과가 처음 실시된 것은 1644년(인조 22)에 역신(逆臣) 심기원(沈器遠) 등을 토벌하고 실시한 갑신정시(甲申庭試)였다. 그 후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을 토평한 뒤 경과로 토역과를 설행하였다. 문과와 무과가 함께 설행되는 정시나 별시로 시행하였으며, 경사가 겹쳤을 때에는 증광시로도 설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토역과는 역적을 토벌한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설행한 과거로 왕이 친림하여 정시, 별시로 실시하였다. 다른 경사와 합쳐서 증광시로 실시한 적도 있었다.

1644년(인조 22)에 9월 1일 토역 정시를 베풀어 문과에 이경억(李慶億) 등 7명을 취하고, 무과에서 이지형(李枝馨) 등 100명을 뽑았다(『인조실록』 22년 9월 1일). 심기원의 모반 사건을 토벌하고 시행한 것으로 『연려실기술』에는 이 시험을 토역과의 시작이라 하였다.

1652년(효종 3)에 설행한 토역 경과는 증광시로 시행하였다. 당초에는 왕세자의 가례(嘉禮)와 토역 두 경사를 합쳐 별시를 거행하려 하였는데 왕세자의 입학을 합쳐 증광시로 거행하도록 하였다(『효종실록』 3년 1월 15일). 10월 24일에 증광시를 설행하여 문과에서 여증제(呂曾齊) 등 3명을 뽑고, 무과에서 김숭(金嵩) 등 32명을 뽑았다(『효종실록』 3년 10월 24일).

1723년(경종 3)에는 토역 정시(討逆庭試)를 설행하여 문과에서 박사유(朴師游) 등 13명을 뽑고, 무과에서 유덕징(柳德徵) 등 478명을 뽑았다(『경종실록』 3년 3월 16일). 이 시험은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마친 뒤 시행한 정시였다.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한 소론의 고변으로 일어난 역모 사건으로 소론이 노론을 몰아낸 후 이를 경하하기 위하여 시행한 시험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세력 변화에 따라 과거 시험 자체를 무효화하는 파방과 과거 합격자를 회복시키는 복과가 번복되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복과되었지만 과명은 별시로 고쳤다(『영조실록』 3년 7월 11일).

1755년(영조 31) 2월, 나주 객사(客舍)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벽서가 걸린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을 체포하고 사건이 마무리된 후 5월 2일에 토역 경과로 정시를 설행하였다. 왕이 친림하여 문과에서 10명을 뽑았다. 무과도 함께 시행하였다.

토역과가 설행된 사례는 정조와 순조대에도 보였다. 1785년(정조 9) 토역 경과 정시 초시를 설행하였고(『정조실록』 9년 10월 16일), 10월 28일 춘당대에 친림하여 문과에 장지면(張至冕) 등 10명을 뽑았다. 1802년(순조 2) 토역 정시에서는 문과에 황명한(黃明漢) 등 3명을 뽑고 무과에 박예강(朴禮綱) 등 11명을 뽑았다(『순조실록』 2년 11월 8일). 1807년에도 토역 정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박승현(朴升鉉) 등 4명을, 무과에서는 이세태(李世泰) 등 75명을 뽑았다(『순조실록』 7년 10월 4일).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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