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탁(囑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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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광무 9)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내정 장악을 위해 파견하였던 임시 관원.

개설

촉탁(囑託)은 일정한 기간에 보수를 받는 조건으로 사업이나 업무를 담당하던 직책으로, 정식 관원이 아닌 임시직으로 근대국가 형성기에 등장하였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국가들이 근대적 관료제 국가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직종의 업무들이 생겨났는데, 외교 통상 업무는 물론 교육, 문화 사업 등에 이르기까지 영역이 매우 다양하였다. 이에 이러한 업무들을 담당할 정식 관원이 필요했지만,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의 인력을 단기간에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촉탁 제도였다. 촉탁은 일종의 임시직으로 주어진 임무를 정해진 기간에 완수하면 해지되었다. 특히 철도, 선박, 전신, 전화, 의료 등의 근대 기술을 습득해야 실행이 가능한 직종들에는 다년간 관련 분야에 종사한 연구자나 기능인이 필요했다. 특히 외국의 시장 수요 조사나 식민지의 역사, 문화를 연구하는 분야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박사 수료 정도의 연구자들이 필요하였다.

한국사에서 촉탁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5년이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통해 통감부를 설치한 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근대적 시설을 관리하기 위한 촉탁들을 대거 일본 내에서 영입하였다. 대한제국 황실과 내각에도 근대적 상법, 농법, 공법, 의료, 공중위생에 관련한 직무에 일본인 촉탁 등이 기용되었다. 대한제국에서도 근대국가로 변모하기 위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시정 개선 사업이 추진되었다. 한양에 수도 시설과 전기통신망의 설치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근대적 시설들을 설치, 관리하기 위해서는 관련 전문가뿐 아니라 그 원형인 유럽 국가들의 선례를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당시 촉탁직 일본인들은 그 분야의 선두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최전방에서 활약하였다.

내용 및 특징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이왕직, 이왕가 등에 촉탁직이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들은 통치에 필요한 조선 전래의 역사 문화의 자료 수집, 인종적 기원 등을 조사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제강점기 직후부터 일본인 학자들을 대거 촉탁으로 임명하여 학술 조사를 실시하곤 했다. 학술 조사 사업은 조선총독부 내무부 산하국 지방 제1과와 학무국 편집과에서 담당했으며 학무국에서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지방국에서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비롯해 몇 명의 학자들을 촉탁으로 임명하였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사편수회 등에 참여했던 학자 출신의 촉탁들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역사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이외에도 1917년 영친왕을 이방자와 결혼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황실제도심의회(皇室制度審議會) 소속의 구리하라 고오타[栗原廣太]가 촉탁으로 파견되었다(『순종실록부록』 10년 4월 10일).

이왕직에 소속된 촉탁의 경우에는 고종과 순종 등의 왕공족이 생활하던 궁궐의 각종 시설을 관리하거나 근대적 토지 계약이나 법률관계의 자문, 동물원과 식물원의 기술적 자문 등을 담당하였다. 이왕직에 소속되던 촉탁들은 1911년 2월부터 근무를 시작했다(『순종실록부록』 4년 2월 1일). 이왕직은 4개의 큰 틀에서 움직였다. 창덕궁의 순종, 덕수궁의 고종, 창덕궁의 왕세자, 이강공 등으로 조선 왕공족을 나누어 관리하였다. 따라서 이왕직 소속 촉탁들은 해당 왕공족이 거주하던 궁궐에서 근무를 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왕직에서 근무한 촉탁들을 보면, 1908년 법전 조서국 고문(顧問) 법학박사 우메 겐지로[梅謙次郞](『순종실록』 1년 1월 1일), 1910년 초 관세국(關稅局) 촉탁이었던 훈6등 월리엄 프라티(『순종실록』 3년 1월 4일), 도쿄에 거처하던 영친왕의 어용(御用) 저택의 회계와 기타 여러 업무에 대한 감독 촉탁이던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순종실록』 3년 2월 26일), 1910년~1920년대에는 덕수궁과 창덕궁에서 의사로 활약한 촉탁의(囑託醫) 스즈키 켄노스케[鈴木謙之助](『순종실록부록』 6년 5월 3일)와 순종의 다리를 주로 치료하던 촉탁의 안상호(安商浩)(『순종실록부록』 13년 12월 4일), 이왕가의 법률문제를 자문하던 변호사 오카다 사카에[岡田榮](『순종실록부록』 7년 5월 10일)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1916년 덕수궁 안에 덕혜옹주를 위한 초등교육 기관인 유치원을 설치하면서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保姆)로 촉탁하였다(『순종실록부록』 9년 4월 1일).

변천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해방이 된 이후에 이왕가에 대한 각종 제도들도 사라졌다. 이왕가를 관리하던 이왕직도 폐쇄되면서 촉탁직도 없어졌다. 다만 당시의 유습이 남아서 오늘날도 한시적인 조사와 연구를 위한 인력을 일컬어 촉탁직이라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寧府日記)』
  • 『창덕궁이왕실기(昌德宮李王實記)』
  • 『이왕직처무규정(李王職處務規程)』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도서해제』 1,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06.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도서해제』 2,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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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명호, 「덕수궁 찬시실 편찬의 『일기』 자료를 통해본 식민지시대 고종의 일상」, 『장서각』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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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英達, 「朝鮮王公族の法的地位について」, 『靑丘學術論集』 14,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