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녕전(徽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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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영조의 첫 번째 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정성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휘녕전은 영조의 첫 번째 비 정성왕후의 혼전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이다.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휘녕(徽寧)’으로 정하고(『영조실록』 33년 2월 21일), 5개월 뒤 홍릉(弘陵)에 장례를 치렀다. 이후부터 1776년(영조 52) 영조가 승하하고 3년상을 치를 때까지 휘녕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757년 2월 15일 정성왕후가 관리합(觀理閤)에서 승하하자 경훈전(景薰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 6월 홍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그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영조실록』 33년 6월 4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휘녕전이다.

휘녕전은 2월 20일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기로 하교했다가 4월 5일 강서원(講書院)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숙종의 두 번째 계비(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부묘한 뒤 인원왕후의 혼전인 효소전(孝昭殿)이 있었던 문정전으로 옮기기로 했다(『영조실록』 33년 7월 1일)(『영조실록』 34년 2월 28일). 인원왕후는 1759년(영조 35) 5월 6일 종묘에 부묘되었다.

이후 영조가 승하하고 그의 혼전인 효명전(孝明殿)을 문정전에 마련하기로 하면서 그곳에 있었던 휘녕전을 강서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다가 다시 효명전을 경희궁의 태령전(泰寧殿)에 마련하기로 하면서 휘녕전은 그대로 문정전에 남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하는 동안 휘녕전은 정성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휘녕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 등이었다. 이때에는 졸곡제를 지내는 날짜를 물려서 거행했는데, 인원왕후의 졸곡을 기다린 뒤에 거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778년(정조 2) 5월 2일 영조와 정성왕후를 종묘 정전 제13실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휘녕전은 정성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57년 6월 4일부터 인원왕후를 부묘한 1759년(영조 35) 5월 6일까지는 강서원에, 인원왕후를 부묘한 뒤부터 영조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78년(정조 2) 5월 2일까지는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휘녕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정성왕후혼전도감의궤(貞聖王后魂殿都監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泰東古典硏究』27,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