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後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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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상 공식 절차와 규정에 적용되지 않는 비공식적 교역.

개설

후시(後市)는 개시(開市)와 상대된 개념으로 비공식성과 불법성을 의미한다. 후시가 개시를 기회로 벌어진 교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시는 개시와 공간성은 같지만 행위의 성격이 다른 교역을 의미하였다. 곧 회동관후시, 책문후시, 중강후시, 북관후시 또는 사시·미시 등은 각각의 외교상 공식 절차와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후시 무역이 중앙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시기가 존재한다. 이 경우 후시무역은 더 이상 불법무역이 아니었다. 그 대신 교역품에 대해 일정한 과세(課稅)가 수반되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공무역과 사무역을 구분하기 위한 차원에서 후시라는 용어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내용 및 변천

후시는 성격상 조선 사행과 관련된 교역, 변경 지역 생활을 위한 교역 그리고 대일무역과 관련된 교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회동관·책문 후시는 사행과 연관된 무역이었고, 중강후시 및 북관후시는 변경무역으로, 왜관후시는 대일본무역이었다. 한편 대외무역의 일반적 형태는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으로 구분되는데, 후시는 경제사적으로는 사무역의 범주에 속하지만 공인 여부에 따라 사무역과 밀무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회동관후시는 조선 사행이 북경에서 머물던 회동관에서 일어난 사무역이다. 조선 사신단은 북경에 도착하여 40일 이상을 회동관에서 머물렀다. 회동관 개시는 떠나는 조선 사신 일행을 위해 마련하는 상마연(上馬宴)이 끝난 뒤에 열렸다. 청나라 예부의 관원이 상품의 불공정 거래자와 잠매자 및 거래 금지품목의 매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고시한 뒤 개시가 시작되었다. 고시 후 북경의 각 점포 상인들이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감시관의 감독 아래 조선 역관 및 상인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귀국 길에 오를 때는 반드시 사행 일행이 무역한 물품의 수량을 기록하여 청나라 아문에 제출하고 아문에서는 그 수를 점검한 뒤 북경을 떠나게 하였다. 또한 예부는 무역 물품의 수량을 산해관과 봉황성에 통보하여 사행의 귀환길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행원역은 은화 2,000~3,000냥 가치의 팔포 및 공용은 등을 이용해 북경에서 자유롭게 교역하였고, 사행원역을 따라 온 각종 명색의 수행인원들 역시 무역 이익을 보기 위해 활동하였다.

책문후시는 사행과 관련된 교역으로서 가장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는 중개무역이 성행했던 17세기 중엽부터 약 100여 년간, 대청무역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무역의 형태였다. 우선 이 시기 동지사행의 사신단 규모는 사행의 공식인원 35명에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만도 220명, 말은 220여 필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심양에 방물·세폐를 분납하고 돌아가는 말도 250여 필 정도 있었다. 이들은 압록강-책문-봉황성-심양-산해관-북경을 오고가는 5~6개월의 긴 여정을 소화해야 하였는데, 책문은 조선 사행이 실질적인 출입국 절차를 밟는 장소였다. 입책(入柵) 혹은 출책(出柵)이란 용어도 이 때문에 생겨났다.

따라서 책문후시는 사행이 책문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일어났고, 심양에 방물세폐를 분납하고 돌아오는 단련사가 책문을 빠져 나올 때에도 열렸다. 여마·연복제는 책문후시와 관련하여 문제시되었다.

여마는 말 그대로 여분의 말을 들여보내는 것이다. 사행 원역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들어가는 중에 방물과 세폐를 실은 말이 혹 쓰러질 것에 대비한 것이다. 그 한도는 10여 태(太) 정도의 짐을 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의주부에서는 사상들에게 은화를 받고 여마의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 이 여마에 짐을 잔뜩 실어 보냈는데, 경우에 따라 그 수는 1천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연복은 여마와 반대로 책문으로 사행의 짐을 실어올 말을 들여보내는 제도였다. 즉 책문으로 들어 온 조선 사행은 의주에서 싣고 온 짐들을 풀어놓았다. 이후 이 짐은 청의 운송업자 난두배(欄頭輩)가 맡아 북경까지 운반하였다. 반대로 북경에서 책문까지의 짐도 난두배가 맡아 운송하였다. 따라서 책문을 나와 의주까지는 사행 일행의 짐을 운반할 말과 사람이 필요하였다. 연복은 바로 이때 의주부에서 사행 원역의 짐을 책문으로부터 실어 내올 말을 파견하던 제도였다. 그런데 복명 기한에 쫓긴 정사·부사·서장관이 먼저 출책하게 되면 책문에서는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역관과 사상들은 연복제를 이용하여 많은 은화를 책문으로 가지고 들어가 교역하고, 다시 사행 원역의 짐이라고 핑계하여 물건을 국내로 반입하였다. 사행원역의 짐은 면세였고 규찰도 약했기 때문이었다.

단련사는 심양 성경부에 방물과 세폐를 바치고 되돌아오는 인마를 인솔하는 임무를 띤 직책이었다. 그런데 17세기에는 조선과 청의 사신접대 및 군사상 무거운 군역을 지고 있던 의주부·평안감영·평안병영·황해감영·개성부 등 5군데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들 아문에서는 지역의 유력한 상인을 무역별장(貿易別將)으로 선발하여 관아무역을 대행시켰다. 무역별장이 가진 팔포를 심양팔포라고 했는데, 이는 이들이 주로 사행을 따라 심양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청의 물품을 매년 수입하여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련사는 이들 무역별장을 인솔하여 오는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심양에서도 무역을 하였지만 대개는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중국 물화를 많이 사들여 왔다. 이를 단련사 후시라고 한다. 이에 심양과 책문에서 구입한 물화가 증가되어, 되돌아오는 빈 말에도 짐을 다 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단련사에게도 연복이 실시되어 의주부에서 책문으로 짐을 실을 말을 내보내는 제도가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면 책문후시의 범주에는 사행이 들고 날 때 사행단이 행한 무역과 여마·연복법에 의한 사상의 무역 그리고 단련사의 책문무역 및 단련사의 연복무역 등이 포함된다. 이 때문에 “책문후시가 1년에 4~5번 열리는데, 매번 사행이 응당 가지고 가는 팔포를 합해 계산하면 1년에 압록강을 건너는 은화가 거의 50~60만 냥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에 1707년(숙종 33) 책문으로 들어가는 상인들을 조사하지 않고 들여보낸 다음 돌아올 때 그들의 포수를 헤아려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로써 책문후시는 합법적인 사무역으로 공인된 셈이다. 책문후시는 이후에도 몇 차례의 치폐 과정을 겪지만 곧 회복되어 유지되었다. 18세기 책문후시의 치폐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중강후시와 회령·경원후시는 변경지역의 생활과 관련된 교역이었다. 중강후시는 중강개시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중강개시가 상인의 참여와 교역 물종이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상인들은 이를 기회로 규정 외 교역을 감행한 것이다. 회령·경원후시 역시 북관개시와 함께 시행되었다. 북관개시에서는 공시(公市)·사시(私市)·마시(馬市) 세 종류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공시는 조선과 청 관원의 감독하에 정해진 물품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농우·농기구·소금·솥 등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조선 측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18세기 전반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는 공시보다는 후시 성격을 지니는 사시와 마시가 활발해졌다. 사시와 마시는 공시가 끝난 뒤, 양국의 사상(私商)들에게 허용된 교역이었다. 양국의 관원은 금지 품목을 제외하고는 교역 물종이나 수량에 간섭하지 않았다.

의의

후시는 사행에 특별한 지위에 있던 역관이나 중앙 아문보다는 그들과 결탁한 사상이나 지방아문과 연결된 유력 상인들에 의해 불법성을 띠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후시는 점차 사무역의 범주로 인정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는 조선후기 상업계의 성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상층이 조선 경제 발전의 주체로 잡아갔음을 뜻한다.

참고문헌

  • 고승희,『조선후기 함경도 상업연구』, 국학자료원, 2003.
  • 유승주·이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철성,『朝鮮後期 對淸貿易史 硏究』, 국학자료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