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華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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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선종에 소속되었으며, 숙종대에 연잉군(延礽君)의 원당으로 지정된 지리산의 절.

개설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이었던 화엄사(華嚴寺)는 조선 세종대에 선·교 양종으로 불교 교단을 정리할 당시 선종 사찰로 공인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화엄사에 대한 기록은 소략한 편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화엄사는 대규모 중창 불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각황전(覺皇殿)은 연잉군(延礽君) 즉 영조의 원당으로 중수되어 조선후기 왕실원찰로 후원받았으며, 부휴계(浮休系)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연원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緣起) 조사(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나, 연기 조사는 8세기 인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현전하는 화엄사 관련 기록이나 유물로 미루어 화엄사는 8세기경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 각황전 뒤쪽의 효대(孝臺)에 조성된 4사자3층석탑은 8세기 화엄사와 관련된 유물이며, 신라하대에는 『화엄경(華嚴經)』 석경(石經)을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각황전 자리에 있던 전각 석벽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소실된 뒤 수만점의 석경 파편만 전한다. 또한 각황전 앞에 있는 사자탑과 석등,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동서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유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최치원(崔致遠)의 글에서 의상(義湘)의 전교십찰(傳敎十刹) 중 하나로 화엄사를 꼽고 있어 신라하대 부석사(浮石寺)와 함께 화엄사도 신라 화엄사찰로서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말여초 화엄사에서는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화엄사에는 승려가 계를 받는 계단(戒壇)도 설치되었다. 후삼국시기 화엄종이 남악과 북악으로 분열되었을 때 화엄사의 관혜(觀惠) 대사는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로 활동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화엄사는 부석사와 함께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의 명성을 이어갔고,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은 화엄사에 들러 연기 조사를 추모하고, 연기의 저술을 다섯 가지나 찾아내어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하였고, 『원종문류(圓宗文類)』 간행에 참여하여 교정을 맡았던 의천의 문도 중에는 화엄사 주지도 있었다. 충렬왕대에는 원소암이 창건되었고, 공민왕대는 적기암이 창건되는 등 고려말에도 화엄사는 건재하였다.

변천과 특징

조선건국 후 세종대 선·교 양종으로 교단을 통합하기 전까지 화엄사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특별한 기록이 전하고 있지 않다. 1406년(태종 6) 명나라 사신 정승(鄭昇)이 돌아갈 때 황모란(黃牧丹)을 화엄사에서 구해서 3개의 화분에 심어서 바쳤다는 것이 세종 이전의 유일한 기록이다(『태종실록』 6년 5월 8일). 1424년(세종 6) 세종이 기존의 7개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선종과 교종 각각 18개씩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할 때 화엄사는 선종 18사 중 하나로 공인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신라시대 이래 화엄사는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알려져 있었으나 세종대에 선종 사찰로 지정됨으로써 조선전기 화엄사의 사찰 성격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 선종 18사로 공인될 당시 화엄사에 원래부터 속해 있던 전지는 100결이었는데 50결을 더 주었다고 하며, 절에 거주할 수 있는 승려는 70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화엄사에 대한 공인은 곧 취소되는데, 같은 해 10월 순천송광사(松廣寺)와 개성흥교사(興敎寺)를 선종 공인 사찰로 새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기존 18사로 공인되었던 화엄사와정곡사(亭谷寺)를 혁파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화엄사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화엄사는 공인 18사에서는 혁파되었으나 이후에도 지리산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자 고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중관해안(中觀海眼)이 화엄사 사적을 편찬하면서 17세기까지의 화엄사의 정황이 전하고 있으며, 1924년 화엄사 주지 정만우(鄭曼宇)가 중관의 화엄사 사적을 바탕으로 화엄사 사적기를 다시 찬술하면서 조선후기까지의 화엄사의 역사가 전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화엄사에 대한 기록은 충분치 않지만, 성종대에는 삼교(三敎)에 통달했던 화엄사 법주(法主) 설응(雪凝) 법사가 화엄사에서 선교를 강론했고, 1520년(중종 15)에는 서산(西山) 대사(大師)의 양육사(養育師)이기도 한 숭인(崇仁) 장로가 청련암에서 선회(禪會)를 여는 등 조선전기 불교사에서 화엄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화엄사에서는 승군을 조직하여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절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전쟁 후 벽암각성(碧巖覺性)이 화엄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조선후기 화엄사의 발전에 토대를 닦았다. 특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성은 화엄사에서 근왕(勤王)을 위한 의승 3,000명을 소집하여 공을 세워 인조로부터 시호와 의발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또한 효종도 잠저 시절 각성을 만났던 인연으로, 1650년(효종 1) 각성이 만년에 주석한 화엄사를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지정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화엄사의 전각 거의 대부분이 소실된 뒤 1630년(인조 8) 대규모 중창 불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중창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699년(숙종 25)~1702년(숙종 28)까지 4년에 걸쳐 2층 70칸의 장육전(丈六殿) 즉 각황전(覺皇殿)이 조성되었는데, 이 불사에는 숙종이 내탕금을 하사하였고, 숙빈최씨(淑嬪崔氏)도 동참하여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원당으로 삼았다. 1701년(숙종 27)에 화엄사는 선종대가람에서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영조대에도 각황전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또한 화엄사는 임진왜란 이후 부휴-각성을 잇는 문도들에 의해 부휴계의 주요 근거지로 자리 잡았는데, 화엄교학의 전통이 강조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30본산제가 시행되면서, 화엄사는 본산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승주 선암사(仙巖寺)의 말사로 지정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1924년 31번째 본산으로 승격되었고, 지리산천은사와 연곡사가 이때 화엄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신대현, 『한국의 명찰 시리즈 2-화엄사』, 대한불교진흥원, 200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