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사(漢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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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남한산성 내에 승병이 거처하던 승영사찰(僧營寺刹).

개설

한흥사(漢興寺)는 인조대에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승병(僧兵)이 머무는 사찰로 세운 사찰이다. 당시 성 내에 있던 9개의 사찰과 성 밖에 있던 1개의 사찰에 나누어 승병이 머물렀다. 남한산성의 승군은 도총섭(都摠攝)을 비롯하여 원거승군(原居僧軍) 138명과 의승(義僧) 356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승병이 머물던 각 사찰에는 군기와 화약이 보관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한흥사는 남한산성 개원사의 동쪽 기슭에 있던 절로, 남한산성 축성 직후 새로 지은 사찰이었다. 인조는 1624년(인조 2)에 총융사(摠戎使)이서(李曙)에게 남한산성의 축성을 주관하도록 했는데, 이서는 승군(僧軍)의 도움을 받아 2년에 걸쳐 성곽을 완공하였다. 당시 승려 벽암각성(碧巖覺性)이 팔도 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승병을 모아 남한산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정조실록』 3년 8월 3일). 이때 산성 축조의 임무를 맡은 승려들은 산성 내에 있던 9개 사찰과 밖에 있던 1개 사찰에 나누어 머물렀다. 10개 사찰 가운데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는 예로부터 있던 사찰이고, 나머지 8개 사찰은 새로 지었다고 한다. 성 내에는 승군 본영(本營)이 있던 개원사를 비롯하여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남단사(南壇寺)가 지어졌고, 성 밖에는 영원사(靈源寺)가 지어졌다. 각 사찰에는 군기와 화약이 보관되어 있었다.

변천

1624년의 남한산성 축성 이후 승군은 산성을 수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1636년(인조 14) 병자년 12월에 청나라 군대가 갑자기 국경을 넘어 한양 도성으로 침입해오자,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성이 청나라 군대에 오래도록 포위되어 왕에게 바치는 물자가 부족하였는데, 한흥사 승려 희안(希安)이 백지(白紙) 40권, 산채와 나복채 한 가마니씩을 바쳤다. 인조는 종이는 비변사(備邊司)에 하사하여 일용에 쓰게 하고, 나물은 왕자·대신·부마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14년 12월 24일).

한편 벽암각성이 성 내에 7개의 사찰을 새로 짓고 그 중에 2곳을 한흥사(漢興寺)와 국청사(國淸寺)라고 이름 붙였지만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1636년 병자년에 청나라가 침입해오자 비로소 그 뜻을 알았다고 한다. 즉 한(汗)과 한(漢)이 동음이므로 여진족을 의미하는 한(汗)이 흥한다는 의미에서 한흥(漢興)이라 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칭한다는 의미에서 국청(國淸)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이하게 여겨 각성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승군은 승군총섭(僧軍摠攝) 1인, 승중군(僧中軍) 1인, 교련관(敎鍊官) 1인, 초관(哨官) 3인, 기패관(旗牌官) 1인, 원거승군(原居僧軍) 138명, 의승(義僧) 35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의승은 경기, 강원, 삼남(경상, 전라, 충청), 황해 등 6도에서 매년 6차례로 나누어 2개월씩 입번하였다. 그런데 의승이 입번할 때 여러 절에서 많은 금전을 내었으므로 그 고통을 이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1755년에 의승의 입번을 면제하는 대신에 입번에 들어가는 금전을 원거승군에게 지급하도록 하여 그 폐단을 없앴다(『영조실록』 31년 8월 14일). 이때 6도의 의승번전(義僧番錢)은 7,039냥(兩) 3전(錢) 7푼(分)이었다고 한다.

한흥사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1907년 8월 1일에 일본군이 남한산성의 무기와 화약을 모두 수거하고 화약고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때 함께 파괴되었다.

참고문헌

  •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전보삼,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재)대한불교진흥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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