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광문과복시(增廣文科覆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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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광시 문과의 2번째 단계의 시험.

개설

증광문과복시는 증광문과초시의 합격자를 대상으로 서울에서 실시되었다. 시험 절차는 초장과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술로 시험하였다. 합격 정원은 33명이며 합격자에게는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내용 및 특징

증광시가 처음 실시된 것은 1401년(태종 원년)이었다. 왕의 즉위 기념으로 즉위 원년에만 시행되다가 선조대부터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에 설행되기 시작하였다. 시험 시기를 제외하고 절차와 방법은 식년문과복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정기적인 시험이기에 시험 시기는 왕의 품지에 의해서 정해졌다.

증광시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규정은 『속대전』에 올라 있었다. 증광문과복시는 초시 합격자 240명을 대상으로 시험 보게 하여 33명을 선발하였다. 대증광의 경우에 7명을 더 뽑았다. 복시는 서울에서 실시하며 1·2소로 나뉘어 시행하였다. 시험장은 성균관·장악원·한성부·예조·사부학당 중 1곳으로 정하였다. 시험관은 종2품 이상 관원 3명과 3품 이하 관원 4명으로 구성하였다.

복시에 응시하려면 녹명을 해야 하는데, 녹명 전에 『경국대전』과 『가례』를 강서하는 전례강(典禮講)을 통과해야 했다. 복시의 절차는 초장·종장으로 이루어졌다. 초장의 시험 과목은 부(賦) 1편과 표(表)·전(箋) 중에서 1편이었다. 종장의 과목은 대책(對策) 1편이었다.

복시 합격은 실제로 문과에 급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단계의 전시는 당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에 따라 등수를 정하는 시험이기 때문이었다.

변천

조선시대에 모두 67회의 증광시가 설행되었는데 이 중 20회가 왕의 즉위 기념이었다. 즉위 기념 외에 나라의 경사가 다양해지며 후기로 갈수록 증광시 설행이 잦아졌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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