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보합(調劑保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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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을 달리하는 당파의 화합을 위한 정치 운영술.

개설

조제보합은 조제지론(調劑之論)·조제지설(調劑之說)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후 이이(李珥) 등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동인과 서인은 같은 사림 계열로, 흑백과 같이 완전히 성향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제보합은 조선중기 동인과 서인의 붕당 형성 이후 양당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제시된 정치 운영술이다. 이전까지는 조정론(調停論)이 있었는데, 이는 중국 북송 때 범순인(范純仁)·여대방(呂大防) 등 구법당 계열 인사들이 조화와 절충을 위해 구법당 계열 이외에 신법당 계열까지도 수용하자고 했던 논의였다.

조제보합은 조정론이 성향을 달리하되 흑백처럼 대비되는 집단을 화합시키려 했던 것과는 달리, 동인과 서인이 모두 사림에서 갈라져 나온 정치 세력이라는 인식에 기초하였다. 이이의 조제론은 양쪽 모두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통해 시비 논쟁을 끝내고, 집권 세력의 주도하에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자는 논리였다.

변천

이이에 의해서 구체화된 조제론은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서인이 남인과 북인을 불러 쓰게 되는 중요한 논리적 기초가 되었다. 이후 조제론 또는 조제보합의 논리는 대다수의 관원이 지지하며, 남인이나 북인이 정계에 나아갈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조제보합의 논리는 이후 숙종 연간 박세채가 제기한 탕평론에 수용되었다. 박세채는 붕당으로 인해 망국으로 이를 수 있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붕당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군자와 소인을 변별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인재의 등용을 주장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 붕당 단위로 하기보다는 개인 단위로 하자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20년 6월 4일). 박세채가 제기한 탕평론은 숙종대를 거쳐 영조 연간에 본격적으로 정치 현장에 적용되었다.

참고문헌

  • 정만조, 「조선시대 붕당론의 전개와 그 성격」,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