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포사(造泡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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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왕실의 능(陵)이나 원(園) 등에 속하여 국가 제사에 쓰이는 제수물품(祭需物品)을 공급하던 절.

개설

조포(造泡)는 두부를 만든다는 의미로, 조포사(造泡寺)는 능묘에서 치러지는 제사에 제물(祭物)을 공급하는 사찰을 의미했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이들 사찰은 능침사(陵寢寺)나 진전사찰(眞殿寺刹), 원당사찰(願堂寺刹) 등으로 지칭되었는데, 능침사의 지위가 점차 하락하면서 명칭 또한 조포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조포사는 능침사와 마찬가지로 능원(陵園)에 속하여 그곳에서 필요한 각종 제수와 소요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능 주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처의 기능이 사라지고, 제물과 노동력 공급 등의 승역만 담당하게 되었다. 왕릉의 조포사에는 선왕의 어영(御影)이나 위패를 모신 어실(御室)이 설치되지 않았지만 세자나 후궁 등의 원묘에 딸린 조포사에는 어실이 설치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조포사란 명칭이 정확히 언제쯤부터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조실록』의 기록과 1819년 정약용이 지은 『아언각비』에는 "각각의 능과 원에는 절이 딸려 있다. 이 절은 두부를 공급해서 조포사라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포라는 용어는 이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716년(숙종 42)~1735년(영조 11)에 각 능의 관리에 관한 문건을 모아 간행한 『각릉등록』에서는 "장릉(長陵)의 능침사인 검단사(黔丹寺)에서 제향 때 조포를 하는 일 자체가 중대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숙종대를 전후해 조포라는 용어가 발견되기 시작하며, 정조대 이후 공문서나 문헌에서 조포사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숙종대 이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조선전기에 능침사로 지정된 사찰까지 조포사라 칭하기도 했다. 『정릉지』에는 "봉은사는 정릉의 조포사"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봉은사는 중종대와 명종대에 선정릉의 능침사로 지정된 사찰이다. 또한 1792년(정조 16) 정조가 광릉에 행차한 후 광릉 능침사인 봉선사가 퇴락한 모습을 보고는 "본릉(本陵)의 조포사는 다른 능과 다른데, 오랜 세월이 지나 폐단이 쌓여 수습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적(古蹟)과 고사(古事)를 어찌하여 무너지도록 방치해 두었는가."라면서, "도백에게 속히 수리하게 하고 승려들의 폐단도 바로잡도록 하라."고 지시했다(『정조실록』 16년 9월 11일). 또한 1790년(정조 14) 수원부사 조심태(趙心泰)가 올린 시정에서 "조포사 승려들의 생활이 빈약하다."(『정조실록』 14년 5월 17일)고 밝혔는데, 여기에서 조포사는 현륭원의 조포사인 용주사를 지칭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이르면 전기에 능침사로 지정된 사찰들과 후기에 능원 수호를 담당한 사찰들을 모두 통칭해 조포사로 불렀다.

조선후기에는 대부분 왕릉이나 원묘에 조포사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조포사에서 담당하는 승역이 능원 보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1800년(정조 24) 5월 헌릉의 나무를 민간에서 몰래 베어가 산이 벌거숭이가 될 지경에 이르자, 예조 판서 이만수는 조포사를 중건해 능을 보호케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정조실록』 24년 5월 9일).

이처럼 조포사는 중앙 정부나 지방 관아에서 관리, 통제하기 힘든 산림 보호 및 각종 잡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예조와 내수사에서는 각 능원마다 조포사를 지정해 이들 사찰을 관리했다.

조선후기 조포사의 현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 문서철은 1930년 5월 10일 이왕직 예식과(禮式科)에서 전국의 능침 관리자들에게 보낸 완문과 능침 관리자들이 담당한 조포사를 조사해서 올린 문서를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란 이름으로 간행한 것인데, 전국의 조포사는 총 35개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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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철에는 예조와 내수사에서 조포사에 내린 완문에 대한 기록도 일부 포함돼 있다. 이에 따르면 조포사에는 제사에 쓰이는 물품 외에는 침탈하지 않으며 과다하게 부과된 잡역을 면제해주었다. 또한 승역이 과중한 조포사를 보조하기 위해 조포속사가 별도로 설치된 사찰도 있었다. 조포속사는 승역을 제공하지 않고 금전적인 보조만 하는 사찰들이다. 융건릉에는 영암 도갑사와 장흥 보림사, 공릉·순릉·수릉에는 영암 미황사, 헌인릉에는 수원 창선사와 광주 백운사, 강진 만덕사, 흥양 검단사 등이 조포속사로 지정되었다.

조포속사가 지정되는 경우는 조포사에서 담당해야 하는 승역이 과도하거나 조포사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조포사에는 전대의 능침사와 달리 왕실의 특혜나 경제적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조포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는데, 내수사나 호조에서는 조포사에 완문을 내려 지방 관아의 잡역을 면제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폐지

사찰들이 담당하던 조포의 역은 1908년 대한제국의 국가 제사의 횟수를 줄이고 사당을 통폐합하는 내용을 담은 칙령인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건」의 반포와 함께 폐지되었다. 이때 대한제국의 국가 제사권이 박탈되면서 조포사들이 담당하던 승역 또한 완전히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
  • 『아언각비(雅言覺非)』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탁효정,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를 통해 본 조선후기 능침사의 실태」, 『조선시대사학보』61집, 조선시대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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