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주인(義理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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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혼란 속에서 등극한 국왕, 특히 정조 임금의 즉위 정당성과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을 지칭하는 말.

개설

넓은 의미에서는 특정한 가치와 명분을 지키고 수호하는 인물을 가리키지만, 조선후기에는 주로 국왕의 등극 명분과 정당성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개인이나 특정 당파가 조정에 출사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명분인 의리가 필요했지만, 정치적 혼란기에 등극한 국왕의 경우에는 자신의 등극을 정당화해줄 명분이 더 절실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의 국왕, 그중에서도 정조 임금의 등극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정권 계승의 정치적인 정당성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을 통상적으로 의리주인이라고 칭하였다.

내용 및 변천

의리주인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조선후기 정조의 즉위 과정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우면서 정조가 의리주인으로 인정한 서명선(徐命善),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를 들 수 있다. 정조의 경우 생부인 사도세자의 사망 이후 영조의 명에 따라서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양자가 되어 세손이 되었지만, 세손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특히 홍인한(洪麟漢)과 김귀주(金龜柱), 정후겸(鄭厚謙)과 같은 인물들은 세손의 지위를 흔들면서 대리청정을 방해하였는데 이때에 서명선, 홍국영, 정민시 등은 세손의 지위를 지키는 데 가장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그 결과로 정조의 등극 후 정조의 등극이 갖는 정치적인 정당성을 정리해서 공표한 의리서인 『명의록(明義錄)』에서 의리의 주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정조실록』 1년 3월 29일) (『정조실록』 15년 9월 13일).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정조의 치세 동안 막강한 정치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정조대에 의리주인의 위상으로 평가받은 인물로는 홍국영 축출에 공을 세운 김종수(金鍾秀)와(『정조실록』 7년 9월 22일)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된 문제인 임오의리를 새롭게 수립하는 데 기여한 채제공(蔡濟恭) 정도를 추가로 언급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성윤, 『조선후기 탕평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유봉학, 『꿈의 문화유산 화성』, 신구문화사, 1996.
  • 박광용, 「조선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정국의 군신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