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長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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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대표적인 명찰로,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선종에 속한 절.

개설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시대 이후 금강산의 명찰 중 하나로 꼽힌 절이다. 특히 원 간섭기에 원과 고려의 지배층이 금강산을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즉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상주처로 중시하면서 금강산은 대표적인 불교 성지가 되었다. 조선전기에도 장안사는 명산대찰로 주목받았으며, 세종대에 선종 18사에 추가되었다. 금강산은 대표적인 명승지로 유명하였으므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기행문이 다수 남아 있어, 당시 장안사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전한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과 과도한 공납 등으로 인하여 장안사도 피폐화되었으나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며 명성을 유지하였다. 한국전쟁 때 절 전체가 파괴되어 지금은 절터만 전한다.

연혁 및 특징

이곡(李穀)이 찬술한 중건비에는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고 고려 성종(成宗) 때 중건되었다고 하였으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고려시대부터 금강산을 대표하는 명찰로 존재하였음은 알 수 있다. 특히 1343년(고려 충혜왕 후4)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후원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기황후는 기술자를 보내 절을 중창하면서 1343~1345년까지 3년 동안 해마다 저폐(楮幣)를 시주하여 절의 상주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또한 은으로 사경한 대장경을 하사하였다. 당시 규모는 120여 칸에 이르렀고,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 석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미래불 15,000구와 과거 53불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실(禪室)에는 천수관음,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이 봉안되었고, 아미타불과 법기보살 그리고 좌우 노사나불이 해장궁(海藏宮)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종이 시주한 토지를 포함 1,500여 결의 전지가 있었고, 개경 시전의 가게 및 염전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사원경제의 규모가 굉장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전기까지도 이때 중창한 불전, 법당, 불상은 존속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사찰이 피폐되고, 이에 여러 차례 중수 공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금강산과 금강산에 위치한 사찰은 명승지로 이름이 높아 여러 사대부들이 유람한 뒤 여행기와 시문을 남겼으며, 겸재(謙齋)정선(鄭敾)의 그림에도 장안사의 모습이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 유점사(楡岾寺)의 말사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절 전체가 파괴되었다.

변천

(1) 조선전기

조선건국 당시 장안사의 정황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금강산 일대가 14세기 이후 원과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미루어 장안사는 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대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안사는 세종대에 처음 확인된다. 1424년(세종 6) 3월 유명무실해진 각 관(官)의 자복사를 모두 폐지하고, 다음 달 세종은 기존의 7개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한 뒤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425년(세종 7) 5월 원래 선종 18사로 공인되었던 전라도 태인의 흥룡사(興龍寺)를 산수가 좋은 곳이 아니라 하여 공인을 취소하고 장안사로 대체하였다. 이와 함께 흥룡사의 전지 150결을 장안사로 이속하였다. 그리고 장안사가 본래 큰 절이라 흥룡사의 전지만으로는 공양이 부족할 것이라 하여 선종에 속한 절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곳의 소유 전지를 줄여서 150결을 추가로 장안사에 주어 총 300결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7년 5월 12일). 1466년(세조 12)에는 세조가 금강산으로 가 장안사, 정양사(正陽寺), 표훈사(表訓寺) 등 금강산의 명산대찰에 행차하고 수륙회를 베풀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2년 3월 21일). 그리고 쌀과 찹쌀 등을 금강산의 사찰에 시주하였다. 1477년(세조 8) 화재로 절이 전소되자 일청(一淸)이 나라에서 금과 쌀을 받아 1483년 중수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찰이 불타고 중수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사세가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조선후기

1790년(정조 14) 8월 원춘도(原春道, 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올린 장계에는 장안사가 강원도에서 가장 큰 사찰임에도 절의 태반이 퇴락하고, 승려들도 4~5명에 불과하다고 피폐상을 전하였다(『정조실록』 14년 8월 23일). 장계에 의하면 장안사의 경우 종이와 미투리 상납을 제외한 여타 사찰에 부여된 각종 공납과 부역이 금지되었다고 하였는데, 사찰의 유지를 위해 종이와 미투리 상납도 금해 달라 청하고 있어, 조선후기 사찰에 부과되었던 각종 공납과 부역이 장안사에도 큰 타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윤사국은 장계에서 감영과 고을에서 물자, 인력, 비용을 대서 사찰을 중수하여 사찰을 회복하고 승려들이 상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윤사국의 청이 받아들여져 이듬해부터 사찰이 중수되고, 이후에도 계속되어 1842년(헌종 8)에는 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의 시주로 300여 칸을 세웠으며, 1863년(철종 14)에는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공명첩(空名帖)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재산을 내어 사찰을 중수하는 등 18세기경에 장안사의 사세는 다시 회복되었다.

이유원(李裕元)의 여행기에는 19세기 장안사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만천교(萬川橋) 옆에는 기적비(紀蹟碑)와 송월(松月)과 응상(應祥) 두 승려의 비석이 있고, 절 문에는 윤사국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 또한 법당의 불상 앞에는 원 순제가 시주한 동기(銅器)와 금과 은으로 사경한 불경이 있었다고 하여, 순제의 시주물이 19세기까지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한편 1917년(순종 10)에는 순종이 함흥 행차에서 금강산을 지나치게 되자 장안사와 표훈사 등이 금강산 도로를 수선하는 등 제반 설비를 한 공로로 돈 300원을 하사받았다(『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가정집(稼亭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임하필기(林下筆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국립중앙박물관, 『아름다운 금강산 유리원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9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대원사, 1999.
  • 강호선, 「14세기 전반기 麗·元 불교교류와 임제종」,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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