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원(板橋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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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 구제를 위해 설치된 절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있던 사회 복지 시설.

개설

판교원(板橋院)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있었던 절이자 빈민 구제 기관이었다. 원(院)은 고려시대에 많이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은 일반적으로 공무(公務)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중요한 길목에 설치된 편의 시설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을 구호하기 위한 기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전에 전국에 설치된 원은 1,310여 개였으며, 소재지는 대부분 교통 요지 및 분기점 그리고 역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원과 더불어 각 고을에 빈객을 접대하기 위하여 관(館)을 두기도 하였다. 원은 역(驛)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역과 원을 합하여 역원(驛院)이라고 하였다. 원은 역과 마찬가지로 교통의 편의를 위한 공공시설로서, 조선시대에는 대개 30리(약 12㎞)에 하나씩 두었으나, 지형 조건에 따라 원 사이의 평지에서는 거리는 다소 멀고 산악 지대에서는 가까웠다. 예를 들면 경기도 광주(廣州)의 판교원과 용인의 보수원(寶樹院), 또 보수원과 죽산의 태평원(太平院) 사이의 간격은 각기 15㎞ 정도인데, 충청도 새재 근처의 신혜원(新惠院)과 동화원(桐華院), 동화원과 조령원(鳥嶺院)은 불과 3㎞ 간격이었다.

1396년(태조 5)에는 승려 자은 도승통(慈恩都僧統) 종림(宗林)이 전 판사(判事)윤안정(尹安鼎)과 함께 판교원(板橋院)을 짓고, 성 쌓는 사람 가운데 병이 있는 자는 의원을 불러다 진찰시키고 약을 지어 치료해 주었으며, 음식도 공급하여 병이 나으면 식량을 주어서 보냈다(『태조실록』 5년 3월 4일).

1404년(태종 4)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조운흘(趙云仡)의 졸기에, 종림과 함께 세속을 떠나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을 중창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기도 하였다고(『태종실록』 4년 12월 5일)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판교원은 절과 빈민 구제 역할 외에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고, 때로는 이곳에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해동역사(海東繹史)』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2008.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