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경(李潤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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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8년(연산군 4)∼1562년(명종 17) = 65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병조 판서(判書)와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중길(重吉)이고, 호는 숭덕재(崇德齋)이며,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을 지낸 이수정(李守貞)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판관(判官)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를 지낸 이세좌(李世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형조 판서를 지낸 이극감(李克堪)이다. 영의정이준경(李浚慶)의 형이기도 하다. 이윤경과 이준경 형제는 모두 문무를 겸전하여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왜구가 영암(靈巖)을 총공격하자, 형제가 영암성을 포위한 왜구를 안팎에서 물리치며 크게 승리하여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진사과(進士科)에는 장원(壯元)하고 생원과(生員科)에는 4등을 하였다.(『중종실록』 26년 8월 15일) 1534년(중종 29)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7세였다.[『방목(榜目)』] 문과에 급제한 후 처음에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의정부 주서(注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를 거쳐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었다. 이어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39년(중종 34)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물을 시험할 때 장원하여 어필(御筆)로써 낙점(落點)하여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540년(중종 35)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직언을 하다가, 공조 좌랑으로 좌천되었다가 바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변방이 시끄러워지자,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전하였다고 하여, 이윤경은 순변사(巡邊使)로 발탁되어 변방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중종실록』 35년 10월 12일) 1541년(중종 36)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임명되었다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나가 명목이 없는 많은 잡세(雜稅)를 없애고 방어를 더욱 엄하게 하였다.

1542년(중종 37) 가을 우리나라 사신(使臣)이 명(明)나라에서 돌아오는 데 오랑캐 군사들이 길을 막고 방해한다는 연락을 받고, 의주목사이윤경이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갔으나, 오랑캐 군사가 오지 않았으므로 우리 사신 일행을 호위하여 돌아왔다. 중종이 이를 듣고 칭찬하기를, “사변을 듣고 날렵하게 달려갔으니, 참으로 변방의 장수로다.”고 하였다.

1544년(중종 39) 봄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이무렵 조정에서는 윤임(尹任)의 대윤(大尹) 일파와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少尹) 일파가 인종(仁宗)과 명종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승정원 승지(承旨)에 임명된 이윤경은 소윤에 가담하였다. 그해 11월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몸이 약한 인종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1545년(인종 1) 인종의 즉위하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폐지된 조광조(趙光祖)의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인종실록』 1년 1월 11일),(『인종실록』 1년 4월 15일)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11월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대윤의 윤임과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하였다. 이윤경은 소윤의 윤원형을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때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또 명종을 세우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 28명을 책훈할 때 3등에 녹훈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명종실록』 즉위년 8월 30일)그러나 맏아들 이중열(李中悅)은 대윤의 사림파를 지지하다가, <이휘(李煇)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9일) 이때 이중열이 몸을 숨겼다가 삼촌 이준경의 설득을 받고 자수하였는데, 이윤경이 아들을 꾸짖기를,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너에게 편안한 일인가.”라고 하였다.(『명종실록』 1년 8월 5일) 이후 아들 이중열은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1547년(명종 2) 사약(死藥)을 마시고 죽었다.(『명종실록』 2년 3월 13일) 이중열은 이조 정랑(正郞)으로서 전도가 유망하였는데, 윤원형 일파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윤경은 1546년(명종 1) 3월 명나라에서 명종의 고명(誥命)을 보내준 것에 대하여 사은(謝恩)하고자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를 보낼 때 그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가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소윤의 1등 공신인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하다고 공격하다가, 이기의 보복이 두려워서 자원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 그가 성주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 백성들이 이에 감복하여 이윤복을 ‘속된 세상이 아닌 구름 사이를 노니는 신선(神仙) 같은 이사또’라고 하여 『구름 사이 이삿또[雲間李使君]』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1548년(명종 3) 좌의정이기에 의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집에서 칩거하다가, 1549년(명종 4) 윤원형에 의하여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이윤경의 상소에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지목하여 배척하는 말이 있다고 하여, 그의 상소문을 승정원에 유치(留置)하고 재차 심의하게 되었다. 당시 이기의 심복이었던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진복창(陳復昌)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이윤경을 공격한 끝에 마침내 이윤경은 문외(門外)로 출송(黜送)되었다. 1553년(명종 8) 영의정심연원(沈連源)이 이윤경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자 명종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고, 용양위(龍驤衛) 상호군(上護軍)으로 삼았다가 형조 참의에 임명하였다.(『명종실록』 8년 4월 7일),(『명종실록』 8년 6월 26일) 이듬해인 1554년(명종 9)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명종실록』 9년 1월 3일)

1555년(명종 10) 여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왜구들이 대규모로 전라도 연안 지방을 습격하며, 장차 영암을 침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김주(金澍)가 전주부윤이윤경을 수성장(守城將)으로 삼았다.(『명종실록』 10년 5월 29일) 이에 이윤경은 전주에서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거느리고 영암성(靈巖城)에 급히 들어가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동생 호조 판서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에 임명하고 왜구를 토벌하게 하였다. 왜구가 영암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수성장 이윤경은 밤중에 정예한 군사를 성 밖으로 내보내어 왜군을 역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도순문사이준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여 포위한 왜구를 공격하자, 수성장 이윤경이 성안에서 왜구를 향하여 활을 쏘아서 공격하였다. 영암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구는 안팎에서 공격을 받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명종은 대승한 보고를 받고, 이윤경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시키고, 그해 8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하였다.(『명종실록』 10년 6월 1일),(『명종실록』 10년 6월 5일),(『명종실록』 10년 8월 2일) 전라도관찰사이윤경이 전라도 지방을 수어(守禦)하는 데에 더욱 힘쓰자 호남의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1556년(명종 11)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를 겸임하여 여러 장수들을 통제하였다. 그해 여름에 휘하의 장수가 명나라 해안을 노략질하고 돌아가는 왜구를 바다에서 가로막고 싸워 포로로 붙잡힌 명나라 사람 1백여 명을 구출하였다. 조정에서 명나라 포로를 중국으로 돌려보내니, 명나라 황제가 포상금을 보내주었다. 그해 가을 경기 연안 지방에 왜구가 출몰하므로 그에 대한 방비가 시급하다는 판단 하에 이윤경을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명종실록』 11년 8월 16일) 1558년(명종 13)에는 오랑캐가 함경도두만강 유역의 6진(鎭)을 침략하므로 오랑캐 방어를 위하여 이윤경을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임명하여 함흥(咸興)으로 보냈다.(『명종실록』 13년 8월 5일) 1560년(명종 15) 명종이 특별히 그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발탁하였으므로, 명종의 측근이 되어 활동하였다.(『명종실록』 15년 1월 5일) 이어 명종의 특명에 따라 자품을 올려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여름에 형조 판서로 옮겨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5년 1월 14일),(『명종실록』 15년 6월 11일)

1562년(명종 17) 명종이 이르기를, “평안도(平安道)가 더욱 중요한 곳이니, 최상의 인물을 뽑아서 보내야 한다.” 하고, 비변사에 적임자를 추천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윤경이 천거되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7년 1월 14일) 이때 이윤경은 오랜 병으로 극도로 수척하였으나 흔쾌히 이를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아직 숨은 끊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일신의 편안만을 바라서 사양하겠는가.”고 하였다. 그리고 평양에 가서 성벽을 보수하고 군사를 점검하는 한편, 구습(舊習)을 일소하고 탐관오리의 농간을 막았으므로 부정부패가 저절로 자취를 감췄다. 그런 가운데 그해 8월 10일 지병으로 평양 감영(監營)의 공관(公館)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5세였다.(『명종실록』 17년 8월 10일) 부고(訃告)가 조정에 알려지자, 명종이 몹시 슬퍼하며 이르기를, “선비 출신 장수이고, 늙은 재상이 외지(外地)에서 세상을 떠나니, 내 마음이 실로 아프다.”고 하고, 반장(返葬)하는 데에 관(官)에서 영구(靈柩)를 호송토록 명하고, 따로 후한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문집(文集)으로 『숭덕재유고(崇德齋遺稿)』가 남아 있다.

을묘왜변 때 영암성 전투와 이윤경⋅이준경 형제의 활약

세종 때 <계해조약(癸亥條約)>에 의하여 왜인에게 3포(浦)를 열어 이곳 왜관(倭館)에서의 공무역(公貿易)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교역하러 3포에 와서 상주하는 항거 왜인(恒居倭人 : 항상 거주하는 왜인)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중종 때 항거 왜인의 숫자를 줄이자, 일본의 쓰시마[對馬島] 도주(島主)가 중심이 되어, 왜구들이 소란과 변란을 일으켰다. 1510년(중종 5)에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고, 이어 1544년(중종 39)에는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왜구들이 변란을 일으킬 때마다 비변사에서는 이를 정벌하고 그 제재조치를 강화하여 세견선(歲遣船)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세견선을 보내어 왜관에서 공무역을 행하는 한편, 일본 상인들은 밀무역(密貿易)을 행하여 중국 비단과 조선 인삼 등을 수입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해방(海防) 정책’을 취하여 일본과 공식 무역을 일절 금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중국의 물품을 수입할 수 있는 곳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로부터 조선 무역권을 위임 받은 쓰시마 도주는 세견선의 제한을 완화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의 무역 통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왜인은 명종 대에 마침내 대규모로 변란을 일으켜서 조선의 남해안을 침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을묘왜변이다.

1555년(명종 10) 여름 을묘왜변이 일어나서 왜구들이 배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대규모로 전라도 연안지방을 습격하여, 영암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 등의 보루(堡壘) 등을 불태우고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방어하던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원적(元積)과 장흥부사(長興府使)한온(韓蘊) 등은 전사하였고, 영암군수(靈巖郡守)이덕견(李德堅)은 왜구에게 사로잡혔다. 왜구들이 전라도 연안지방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장차 영암마저 침략하려고 하자, 전라도관찰사김주는 전주부윤이윤경을 임시로 영암의 수성장으로 삼았다. 이에 전주부윤이윤경은 급히 서둘러 정예부대를 뽑아 거느리고 영암성으로 급히 달려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때 비변사에서는 동생인 호조 판서이준경을 도순찰사에 임명하고, 방어사(防禦使)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게 하였다.

도순찰사이준경은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 나주)에 도착하여, 형 이윤경이 영암의 임시 수성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이준경은 격문(激文)을 띄우기를, “방어사가 이미 입성(入城)하였으니, 가장(假將 : 임시 수성장)은 임지(任地)로 돌아가서 자기의 성이나 지키시오.” 하였다. 그러자 군사들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치기를, “사또께서 아침에 성을 나가면, 저희들도 저녁나절까지 모두 흩어지리다.” 하니, 방어사김경석과 남치훈이 깜짝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였다. 이때 수성장 이윤경이 도순찰사 동생에게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 “장수와 군사가 굳게 뭉쳐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우는데, 지금 내가 움직이면 장차 앞일을 헤아릴 수 없으니,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하였다. 동생 이준경은 먼저 형 이윤경의 안전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동생이 형을 지휘하는 것이 거북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조처를 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형은 동생의 제안을 거절하고 싸움터에 남았다.

이윽고 왜적들이 포로들을 끌고 영암성 아래에 이르러, 포로의 목을 베어 내던지면서 휘파람을 불고 날뛰다가 성가퀴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온 성안이 기가 꺾이면서 사람들은 도망쳐 흩어질 것만을 생각하였는데, 수성장 이윤경이 몸소 성안을 돌아다니며 나라에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기를, “나는 원래 여러 대에 나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며, 이제 이곳 성주(城主)가 되었으니, 나는 이 성과 함께 생사를 같이할 것이다. 너희들도 태평한 시대 나라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니, 하나같이 힘과 마음을 합하여 도적떼들을 무찔러 무공(武功)을 세워서, 나와 같이 나라의 상을 받지 않겠는가.” 하며, 군사들을 도닥거리고 달래니,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없었다. 이에 수성장 이윤경은 일부러 대장 깃발을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도록 명하여, 왜적의 화를 촉발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수성장 이윤경의 휘하 군졸 가운데 몇 명이 영암성 밖으로 나가서 왜적과 싸우기를 자청하자, 이윤경은 왜적의 능력을 한번 탐지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음식을 흡족하게 먹인 후 성을 나가서 싸우도록 허락하였다. 그들이 밤중에 성을 몰래 나가서 왜적의 막사를 습격하여 왜적의 목을 베어 바쳤는데, 그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수성장 이윤경은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상을 주고 군졸의 사기를 북돋우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이윤경이 부상을 입은 군사를 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자, 군사와 백성들이 더욱 감격하여 분발하였다. 왜구가 영암성을 거듭 공격하였으나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서 왜적과 싸운 끝에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순찰사이준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여 영암성을 포위한 왜적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 안의 군사들도 기가 꺾이지 않고 왜군을 향하여 활을 쏘다가 마침내 성 문을 열고 성 밖으로 나와 왜적들을 무찔렀다. 영암성을 포위한 왜적은 안팎으로 공격을 받아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수성장 이윤경과 도순무사이준경 형제는 영암성 안팎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마침내 위태로운 영암성을 보전하였다. 전라도 지방의 계엄이 풀리고 나라 전체가 평안을 되찾은 것은 이윤경과 이준경 형제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왜구는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그 뒤에 쓰시마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고 사죄하면서,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를 승낙하면서도 세견선을 더욱 줄였는데, 이에 대한 일본 막부(幕府)의 불만이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성품과 일화

이윤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상과 도량이 넓고 깊으며, 의지가 순수하고 곧았다. 또 청렴 검소한 행실과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명종실록』 17년 8월 10일)

1498년(연산군 4) 이윤경은 서울의 연화방(蓮花坊)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인물이 비범하여 여러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 때에도 입에 욕지거리를 하는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 이세좌가 승정원 승지로 있을 때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을 전달한 것이 문제가 되어,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할아버지 이세좌를 비롯하여 백부·숙부 및 아버지 3형제가 모두 참혹하게 죽었다. 이후 이윤경의 가족은 충청도 괴산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모두가 그를 ‘어린 봉(鳳)’, 또는 ‘천리마’라고 일컬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외할아버지 판관신승연이 외손자들을 길렀다. 외할아버지 신승연은 항상 이윤경·이준경 형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이들의 어머니 신씨에게 부탁하기를, “이 아이들은 재능과 도량이 후일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조심하여 잘 보살펴라.” 하였다. 어머니 신씨는 직접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가르치면서 항상 타이르기를, “과부의 아들은 보잘 것이 없으므로 벗으로 사귀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너희들은 부지런하고 공손하지 않으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였다. 어린 이윤경·이준경 형제는 어머니의 교훈을 받들고 오로지 독서에만 힘써서 학식을 넓혔으나,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닌 자기의 심성(心性)을 닦는 성리학(性理學) 공부에 더욱 부지런하였다.

이윤경은 남의 착한 말을 들으면 언제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친절하게 대하였다. 이에 저속한 불한당이나 어린 개구쟁이들도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었다. 화복(禍福)과 사생(死生)을 논할 때에는 모든 일은 갑자기 닥치므로 그 조짐 없다고 말하였고, 대사(大事)를 결정할 때에는 사사로운 자기 소견으로 좌지우지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외유내강하였고 덕행과 기량이 어릴 때부터 이루어졌다.(『명종실록』 17년 8월 10일) 집안에 적은 양의 식량도 없거나 전지(田地)에 한 말이나 한 되의 곡식을 거두지 못하여도 근심하지 않고 어느 때나 마음을 편안하게 가졌는데, 이것은 그가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사물을 포용하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변방의 보루를 드나들면서 군사를 훈련시켜서 전투에 숙달하게 만든 것을 보면, 그가 장수의 재능도 갖춘 큰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이윤경은 아버지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항상 가슴 아파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 기일(忌日)이 되면 곡(哭)을 하며 제사를 모시고 슬퍼하는 것이 초상(初喪) 때와 같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맏아들 이중열이 대윤의 윤임 일파로 몰려 사사되자,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553년(명종 8) 용서를 받고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겉으로는 태연하였으나, 속으로는 몹시 슬퍼하고 괴로워하였다. 한편 형제 간에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같이 우애가 두터웠다. 동생 이준경과 이웃에 같이 살면서 극진한 우애를 서로 나누었다.(『명종실록』 17년 8월 10일) 동생 이준경과 함께 거처할 때에는 한자리에 불러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처럼 서로 마주앉아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외출에서 돌아온 후에는 반드시 동생 이준경과 대면한 다음에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윤경은 가는 곳마다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가 지은 「정완(訂頑)」과 장역(張繹)의 「좌우명(座右銘)」, 그리고 기타 성현(聖賢)의 격언(格言) 등을 손수 적어 벽에다 붙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이와 같은 문자를 항상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겨두면, 경솔함을 바로잡고 게으름을 경계하여, 마음의 지혜를 열어서 충분히 보탬이 될 것이다.” 하였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은 책상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항상 책을 읽었는데, 충신(忠臣)·의사(義士)·명현(名賢)들의 사적을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헌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근(陽根) 서쪽 고요동(高要洞)에 있는데,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뒤에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와 합장하였다.

부인 고령 신씨는 현감(縣監)신종하(申宗河)의 딸인데, 3남 4녀를 두었다. 장자 이중열은 이조 정랑을 지냈으나, 이휘의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차남 이숙열(李叔悅)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3남 이계열(李繼悅)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장녀는 현령(縣令)유기(柳沂)의 처이고, 차녀는 유학(幼學) 윤해(尹海)의 처이다. 3녀는 판관(判官)송응기(宋應期)의 처이며, 4녀는 현감(縣監)송응서(宋應瑞)의 처이다. 측실(側室)의 아들로 이서열(李庶悅)이 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숭덕재유고(崇德齋遺稿)』
  • 『동고유고(東皐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잡기(寄齋雜記)』
  • 『간이집(簡易集)』
  • 『기언(記言)』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와잡설(松窩雜說)』
  • 『우복집(愚伏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월정만필(月汀漫筆)』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퇴계집(退溪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강집(寒岡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