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진집(瘡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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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소아 전염병인 두창과 마진을 치료하기 위하여 편찬한 방역 전문서.

개설

『창진집(瘡疹集)』은 세종대에 편찬한 『창진방(瘡疹方)』을 전범으로 하여 세조대에 임원준(任元濬)이 편찬한 것으로 조선전기 방역 전문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책이었다. 현전본은 을해자로 간인한 3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국내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중국 절강성도서관에서 발견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원래 세종대에 찬집한 『창진집』(혹은 창진방)이 있었으나 실물이 전해지지 않으며, 1457년(세조 3)에 왕명으로 임원준이 세종대의 것을 개편하고 이극감(李克堪)의 산정(刪定)과 이예손(李禮孫)의 수교(讐校)를 거쳐 펴냈다. 이 책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학권징(醫學勸懲) 조항에 오를 정도로 비중 있는 전염병학 교과서였으며, 여러 차례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 사항

을해활자로 인쇄한 책으로, 중국 절강성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구성/내용

두창(痘瘡)과 마진(麻疹)은 소아의 전염성 질환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류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할 정도로 그 유래가 길다. 유아 사망률을 높이는 주요 질환이었으며, 의원들로서는 조선시대 내내 끈질긴 싸움을 벌여야 했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역대 의서 소아 부문의 태반이 이 병의 처치에 관한 치론(治論)으로 할애되어 있었다.

『창진집』은 조선전기 방역 전문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책이다. 원래 세종대에 찬집한 『창진집』(혹은 창진방)이 있었으나 실물이 전해지지 않으며, 1457년(세조 3)에 왕명으로 임원준이 세종대의 것을 개편하고 이극감의 산정과 이예손의 수교를 거쳐 펴냈다. 이 책은 『경국대전』의 의학권징 조항에 오를 정도로 비중 있는 전염병학 교과서였으며, 여러 차례 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전하는 것은 드물었다.

책에 실린 내용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과 더욱 밀접한 상관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의방유취』「소아 진두문(疹痘門)」의 내용을 분류, 재편하여 증보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1459년(세조 5)부터 시작된 『의방유취』의 교정 직전 산물이며, 세종대 초편본에 담긴 창진 관련 내용을 한층 심화시켜 전문 의서로 개편한 것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저자는 중요 구절마다 해설과 음훈을 주석으로 달아[遇有難解 略爲附註―自序] 교과서로서의 기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중·하 3권으로 편제된 이 책은 상권에서 이론 부분을 제가론(諸家論)으로 요약정리하고, 중권과 하권의 치료 처방편은 창진의 예방(豫防)·발출(發出)·화해(和解)·구함(救陷)·소독(消毒)·호안(護眼)·최건(催乾)·멸반(滅瘢)·통치지제(通治之劑) 9가지로 분류해 시기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 책의 저자 임원준은 1445년(세종 27) 『의방유취』 초편에서부터 세조대의 교정, 1477년(성종 8)의 간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두루 간여하였으며,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아 입신양명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과거 시험의 부정 사건과 정실 인사,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정치적 알력에 휘말리는 등 파란 많은 인생을 겪었지만 의학에 정통하여 의학 발전과 교육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이루었다. 그는 세조가 친찬(親撰)한 『의약론(醫藥論)』을 주해하고 인반(印頒)하였으며, 의학습독교수를 역임하면서 당대 의료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그간 일본에 조선 초본이 남아 있다고 전해질 뿐 간본(刊本)을 볼 수 없었는데 근년에 중국 절강성도서관에서 발견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의방유취』와 마찬가지로 을해활자로 인쇄되었고, 저술 시기로 보아 이 활자로 찍은 책으로서는 초기 인본(印本)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조가 즉위년에 만든 을해자는 강희안(姜希顔)의 서체를 받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필체로 만든 경오자(庚午字)를 녹여 주조한 것이다. 특히 중권 첫 면의 하단에 큼지막한 직사각형의 관인이 찍혀 있고 그 옆에 ‘내의원(內醫院)’이라고 첨서(僉署)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내의원에 비치해 두고 사용하던 책으로 생각된다.

또 한 가지(1가지) 중요한 점은 이 책의 부록으로 붙어 있는 『본조경험방(本朝經驗方)』에 두창에 관한 임증례가 실려 있어 실전 의서인 『본조경험방』의 편린(片鱗)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후대에 기록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서문에는 김안국(金安國)이 『창진방』과 『벽온방(辟溫方)』을 언해하여 팔도에 보냈다고 되어 있었다. 이때 쓰인 창진방이 임원준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창진조」에도 “의서로 『창진방집(瘡疹方集)』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 임원준이 지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동의보감』「소아문」의 두창에도 『창진집』의 내용이 적지 않게 채록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608년(선조 41) 허준에 의해 『두창집요(痘瘡集要)』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염성 질환의 주요 의서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한국한의학연구원 편, 『의성허준저작집』해제 , 한국한의학연구원, 2014.
  • 안상우, 「『瘡疹集』-의방유취 편찬의 열쇠」, 『고의서산책』 39회, 민족의학신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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