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현문(崇賢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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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숭현문 |
한글표제 | 숭현문 |
한자표제 | 崇賢門 |
상위어 | 문(門), 경희궁(慶熙宮) |
관련어 | 경현당(景賢堂)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서울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조옥연 |
장소 | 경희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1칸/측면 1칸 |
양식 | 행각솟을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숭현문(崇賢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37년 1월 5일, 『영조실록』 36년 10월 7일, 『영조실록』 38년 11월 11일, 『영조실록』 39년 1월 9일, 『영조실록』 39년 12월 21일 |
경희궁 동궁의 정당인 경현당의 정문.
개설
‘숭현(崇賢)’이란 어진 것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궁궐문의 이름에 ‘현(賢)’ 자가 들어있는 경우는 대개 동궁의 영역 안에 있는 문일 때가 많다. 왕재의 교육을 받는 세자에게 어짊과 현명함은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경희궁 동궁의 정당인 경현당의 정문을 숭현문(崇賢門)이라 한 것은 이처럼 당연한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현당은 경희궁 안의 모든 전각 가운데 숭정전 다음으로 넓고 환한 건물이라 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공간이었으며, 이 전각의 정문인 숭현문에서는 국가의 수많은 의례가 이루어졌다.
위치 및 용도
숭현문은 경희궁의 동남쪽에 있었다. 궁궐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면, 세 번 이상 꺾여 궁궐 안을 감돌아 흐르는 금천을 가로지르며 금천교가 놓여있고, 다리를 건너 어도를 따라 건명문 안으로 들어가면 궁궐의 전각들이 펼쳐지는데, 가장 먼저 만나는 오른쪽의 문, 즉 어도의 북쪽에 놓인 문이 경현당의 정문인 숭현문이었다. 경현당의 영역은 남쪽을 바라보며 행각으로 둘러싸였는데 행각의 동쪽에 둘, 서쪽에 둘, 남쪽 행각과 북쪽 행각에 각각 하나씩 문을 내었다. 동행각에는 협화문과 만상문이, 서행각에는 청화문과 통현문이 있었고 북쪽에는 담장 사이에 숭덕문이 있었다.
인조와 영조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경희궁을 시어소로 사용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숭현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영조 때의 것이다. 인조가 경희궁에 머물렀지만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이 된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모두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기 때문에 동궁의 존재가 미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영조 때의 기록에는 각종 국가의 의례를 위한 향과 축문을 전달하고 지영하는 장소(『영조실록』 37년 1월 5일), 시험에 입격한 자들에게 시상하는 장소(『영조실록』 36년 10월 7일),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위로하는 장소로 쓰였다. 또한 각 도의 굶주린 백성을 불러 국수를 먹이고 저고리를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영조실록』 38년 11월 11일), 70세 이상의 백성과 부녀자들에게 왕이 친히 숭현문에 나가 쌀을 하사하기도 했고,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거꾸로 사은을 받는 장소로도 쓰였다(『영조실록』 39년 1월 9일). 그 밖에 각종 시험과 심지어 마주 보고 앉아 시험을 치는 면시(面試)를 행하는 장소로도 쓰였다(『영조실록』 39년 12월 21일).
고종대에 중건된 경복궁의 편전을 출입하는 문의 이름도 숭현문이었다. 두 문을 비교하자면 경희궁의 숭현문에 비해 경복궁의 숭현문은 비교적 낮은 위계의 문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및 현황
숭현문은 광해군 연간에 경희궁이 창건되던 때에 함께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복원되지 않았다.
형태
숭현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문으로 행각의 사이에 솟을문으로 조성되었다. 2짝의 판장문을 달았고 맞배지붕이다. 지붕의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장식하여 격조가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일성록』 1761년(영조 37) 1월 4일의 기록이다. 영조와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이 경희궁을 나가 정성왕후의 혼전이 마련된 창경궁의 휘령전에 들렀다가 환궁하는 때였다. 왕과 왕세손이 함께 하는 행렬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큰,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경희궁으로 환궁하는 모습을 백성들이 보고 있음을 의식한 영조는 흥화문을 통과하고 금천교를 건너 건명문 밖에서 연을 멈추었다. 연과 여, 그리고 교자를 갈아타는 일은 위계에 관계되어 중요한 의절이었다. 왕이 신하에게, 왕세손이 자신의 행차를 뒤따라오다가 정문 흥화문에서 내려 흥화문의 협문에 놓인 교를 갈아탈 것인데, 백성들에게 세손이 함께 수가하여 휘령전에 다녀온 것을 알게 하려 하니 세손이 교를 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손은 왕의 명을 따르지 않고 할아버지인 영조가 완전히 궁궐로 들어가신 다음에나 교를 타겠다고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왕세손의 예의와 범절을 지키는 모습에 무척 기뻐하며 이 일을 신하들이 그렇게 하도록 왕세손에게 조언하였던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때 홍봉한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니 왕이 더욱 기뻐하며 숭현문 밖에서 왕세손을 불러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가르치며 왕세손의 대답을 기뻐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한경지략(漢京識略)』
- 『홍재전서(弘齋全書)』
- 최종규, 「경희궁 복원을 위한 전각배치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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