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홍씨(元嬪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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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6년(영조 42)~1779년(정조 3) = 14세].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의 후궁. 시호는 인숙(仁淑)이고,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낙춘(洪樂春)으로 호조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어머니 우봉 이씨(牛峰李氏)는 이유(李維)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홍창한(洪昌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홍양보(洪良輔)이다.

정조의 후궁

홍원빈(洪元嬪)은 정조대 권신인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이다. 13세가 되던 1778년(정조 2)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궐하여 원빈(元嬪)에 봉해졌다.(『정조실록』 2년 6월 21일),[『승정원일기』정조 2년 6월 21일] 홍원빈은 궁에 들어올 때 정조의 정비였던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비를 맞아들일 때의 가례(嘉禮)를 치렀을 뿐만 아니며, 약방과 조정의 문안을 받았다.(『정조실록』 2년 6월 27일)[『승정원일기』정조 2년 6월 28일]

이렇듯 성대한 예식을 치루며 입궐하였으나 홍원빈은 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듬해 1779년(정조 3) 5월 7일 창덕궁(昌德宮) 양심합(養心閤)에서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정조실록』 3년 5월 7일),[『일성록』정조 3년 5월 7일 3번째기사] 홍원빈이 죽자 정조는 명(明)나라 비빈(妃嬪)의 예에 따라 시호(諡號)를 인숙(仁淑),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追贈)하고, 삼도감(三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해 온 조정이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정조실록』 3년 5월 7일) 『한중록(閑中錄)』에는 홍국영이 홍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홍원빈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국영도 실각하였다가 1781년(정조 5)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홍원빈이 후사도 없이 일찍 죽었는데 빈작(嬪爵)과 원호(園號)를 준 것은 부당하다며 삭탈을 요청하였다.[『일성록』정조 9년 7월 8일 8번째기사] 그 결과 1786년(정조 10) 11월 인명원(仁明園)과 효휘궁(孝徽宮)은 혁파되었다.(『정조실록』 10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정조 10년 11월 14일],[『일성록』정조 10년 11월 14일 6번째기사]

한편 정조는 홍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어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을 남겼다. 그 밖에 홍원빈을 주인공으로 한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淑昌宮入闕日記)』가 전해진다.

묘소와 후손

홍원빈의 무덤은 본래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현 고려대학교 경내에 있었으나 1950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서삼릉 경내 후궁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처음에는 묘 이름을 인명원으로 지었으나 후궁의 묘에 왕세자의 묘를 가리키는 '원'의 호칭을 사용한 것은 가당치 않고,[『일성록』정조 6년 6월 1일 3번째기사] 인명(仁明)이란 두 글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휘호이기 때문에 적합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므로,(『정조실록』 10년 1월 22일) 원호는 1786년(정조 10) 혁파되었다. 1970년 서삼릉이 사적 제200호로 지정될 때 함께 지정되었다.

홍원빈은 정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두지 못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한중록(閑中錄)』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정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