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李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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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5년(세조 1)~1505년(연산군 11) = 51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통지(通之)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평산부사(平山府使)이경(李庚)이며, 어머니 성씨(成氏)는 한성부윤(漢城府尹)성득식(成得識)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 부사(副司)이대(李臺)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이원(李原)이다.

연산군 시대 활동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천거를 통해 등용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이어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이 되었고,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와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을 거쳐 영천군수(永川郡守)에 임명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선공감(繕工監)으로 전임되었다.

1503년(연산군 9)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나, 영천군수로 있을 때 불법행위를 일삼았다고 탄핵을 받아 사복시 부정(副正)으로 전임되었다.(『연산군일기』 9년 5월 13일)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에는 제용감(濟用監) 정(正)에 임명되었다. 이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자 투옥되었다가 1505년(연산군 11)에 풀려난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1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식견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모임에서 벗들이 술을 권하면 얼근하게 취해서 종일토록 시문(詩文)을 토론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양지현(陽智縣) 동쪽 봉수산(熢燧山) 언덕에 조성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기도 양평이며,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신씨(申氏)는 창신교위(彰信校尉)신경문(申景文)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해(李瀣)는 별좌(別坐)를 지냈고, 차남은 이함(李涵)이다. 장녀는 사헌부 장령이홍간(李弘幹)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백사집(白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