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박씨(敬嬪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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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3년(중종 28) = ?].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의 후궁.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생부는 박수림(朴秀林)이며, 친부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정국공신(靖國功臣) 박원종(朴元宗)이다. 생조부는 박한성(朴漢城)이고, 친조부는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박중선(朴仲善)이며, 친증조부는 돈녕부(敦寧府) 부지사(副知事)박거소(朴去疎)이다.

중종의 후궁

박경빈(朴敬嬪)은 연산군(燕山君) 대에 채홍(彩紅)의 일 때문에 그 재색이 알려졌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추천을 받아 궁에 들어와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중종실록』 22년 4월 26일) 숙의(淑儀)에 봉해졌던 그녀는 1509년(중종 4) 9월 아들을 출산하였으며, 이어 소의(昭儀)로 작위가 올랐다.(『중종실록』 4년 9월 15일)

1515년(중종 10)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사망하고 새 중전에 대한 간택 논의가 있을 때 당시 중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던 후궁 박경빈을 중전으로 삼는 것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박경빈이 중전이 된다면 중종의 장남으로 장경왕후의 아들(훗날의 인종)보다 6살이 많던 복성군(福城君)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광필(鄭光弼)이 중전은 미천한 출신이 아닌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라 진언하며 반대하였다.(『중종실록』 12년 7월 22일)

이후 정1품 빈으로 책봉되어 경빈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나, 1527년(중종 22) 2월 세자(훗날의 인종(仁宗))를 저주하기 위해 쥐의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것을 동궁전에 매달아 놓은 일명 <작서의 변> 사건(『중종실록』 22년 3월 22일)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중종실록』 22년 4월 14일),(『중종실록』 22년 4월 14일)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던 박경빈은 자신이 낳은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고 싶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일이 발생하자 김안로(金安老) 등이 박경빈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박경빈은 아들 복성군과 함께 그해 4월 21일 폐서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나 본가가 있던 상주(尙州)로 보내졌고,(『중종실록』 22년 4월 21일),(『중종실록』 22년 4월 21일),(『중종실록』 22년 4월 21일) 박경빈의 아버지 박수림과 오빠 박인형(朴仁亨)·박인정(朴仁貞) 역시 파직되었다.(『중종실록』 22년 4월 26일)

박경빈이 폐출된 후에도 대신들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릴 것을 간언하였으나 중종은 거부하였다. 그러다 결국 1533년(중종 28) 5월 23일 박경빈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28년 5월 23일),(『중종실록』 28년 5월 23일) 그러나 실제 이 사건은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의 남편 연성위(延城尉)김희(金禧)가 아버지 김안로의 사주를 받아 벌인 것이 밝혀져 이후 복권되었다.

묘소와 후손

박경빈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에 위치해있다.

박경빈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복성군이미(李嵋)로 윤인범(尹仁範)의 딸과 혼인하였다. 1527년(중종 22) 왕세자 저주사건인 작서의 변으로 어머니 박경빈과 함께 상주로 유배를 갔는데, 1533년(중종 28) 5월 23일 박경빈이 사사되자 대신들은 복성군도 함께 사사할 것을 청하였다.(『중종실록』 28년 5월 23일),(『중종실록』 28년 5월 24일) 이에 대해 중종은 박경빈을 처벌한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자 하며 복성군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였으나 계속되는 대신들의 주청으로 인하여 그해 결국 5월 26일 복성군을 사사하였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의 주모자가 박경빈과 복성군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며 복성군은 1541년(중종 36) 복권되었다.(『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박경빈의 1녀는 혜순옹주(惠順翁主)로 광천위(光川尉)김인경(金仁慶)과 혼인하였다. 2녀는 혜정옹주(惠靜翁主)로 당성위(唐城尉)홍려(洪礪)와 혼인하였다. 작서의 변 사건 때 혜순옹주의 계집종들이 문초를 받았고,(『중종실록』 22년 4월 15일) 혜정옹주의 남편인 홍려는 이 사건으로 신문을 받던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이어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는 작서의 변으로 어머니 박경빈과 오빠 복성군이 사사됨과 함께 폐서인되었으며, 혜순옹주의 남편 김인경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어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이후 1541년(중종 36) 사건의 주모자가 밝혀지면서 두 옹주와 김인경은 신원되었다.(『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보감(國朝寶鑑)』
  • 김돈, 「중종대 ‘작서의 변’과 정치적 음모의 성격」, 『한국사연구』119, 2002.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