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정씨(貴人鄭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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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귀인정씨 |
한글표제 | 귀인정씨 |
한자표제 | 貴人鄭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연산군 |
집필자 | 정주영 |
봉작 | 귀인(貴人)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사망 | 1504년(연산군 10) |
본관 | 초계(草溪)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
조부 | 정발(鄭發) |
부 | 정인석(鄭仁石) |
형제 | (남동생)정숭의(鄭崇義) (언니)안한웅(安漢雄)의 처 |
처_장인 | (남편)성종(成宗) →(자녀)2남 1녀 |
자녀 | (1자)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 (2자)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 (1녀)정혜옹주(靜惠翁主)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귀인정씨(貴人鄭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0년 6월 27일, 『성종실록』 19년 9월 18일, 『성종실록』 10년 6월 2일, 『성종실록』 13년 8월 16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1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7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6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6일, 『연산군일기』 11년 1월 26일, 『중종실록(中宗實錄)』 1년 10월 27일, 『중종실록』 1년 11월 11일 |
총론
[?~1504년(연산군 10) = ?]. 조선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후궁. 본명은 정금이(鄭金伊)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인석(鄭仁石)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정발(鄭發)이다. 성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바로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 정혜옹주(靜惠翁主)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에게 몽둥이로 맞아 세상을 떠났다. 아들들인 안양군과 봉안군도 유배를 가서 1년 후 죽임을 당하였고, 정혜옹주는 작위를 박탈당한 채 유배를 갔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작위를 회복하였다.
성종의 후궁
정귀인(鄭貴人)은 성종의 후궁으로 성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숙용(淑容)에 머물렀다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소의(昭儀)가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대왕 묘지문],(『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0년 6월 27일) 한편 정귀인은 신분이 미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성종은 정귀인의 동생을 양인(良人)이 되도록 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성종실록』 19년 9월 18일)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이후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귀인(貴人)으로 작위를 회복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성종조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해 죽음과 복위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윤씨는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성종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윤씨는 투기가 심하여 여러 가지 일을 저질렀는데, 결국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성종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진노를 사서 폐비되었다.(『성종실록』 10년 6월 2일) 그러나 훗날 연산군이 되는 세자가 장성하면서 폐비윤씨의 처우 문제가 쟁점화 되었고, 이에 성종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사사(賜死)하게 하였다.(『성종실록』 13년 8월 16일)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어머니인 윤씨가 폐위되고 죽는 과정에 정귀인과 엄귀인(嚴貴人)의 참소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정귀인과 엄귀인을 대궐 뜰에 결박한 후 직접 그들을 마구 치고 짓밟았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그리고 정귀인의 아들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정귀인과 엄귀인이 죄인이니 몽둥이로 두들겨 팰 것을 명령하였다. 한밤 중이었던 탓에 안양군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몽둥이로 두들겨 팼으나, 봉안군은 어머니 정귀인이라는 것을 알아 채고 차마 몽둥이를 대지 못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그러자 연산군은 더욱 화가 나서 사람을 시켜 정귀인과 엄귀인을 마구 치게 하는 등 갖은 참혹한 짓을 한 후 마침내 그들을 죽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산군은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정귀인과 엄귀인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으로 만들어 산과 들에 흩어버리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그리고 안양군이 어머니인 정귀인을 명령대로 몽둥이로 때렸다 하여 안양군에게 말을 상으로 주었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1일) 이런 가운데 연산군은 정귀인의 아들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털을 잡고 인수대비 침전으로 가서 방문을 열고 욕을 하며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이어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을 옥에 가두고 장 80대씩을 때린 후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이에 안양군은 제천(堤川)에, 봉안군은 이천(伊川)에, 정혜옹주는 백천(白川)에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7일) 그리고 연산군은 정귀인의 직첩을 빼앗은 후 서인으로 삼고, 하사받은 노비 및 전지를 빠짐없이 찾아 환수하였다. 또 후궁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게 하며 그 아들들 역시 종친(宗親)으로 보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6일) 정귀인의 부모와 동생에 대해서는 난신(亂臣)의 예에 따라 연좌(連坐)하라고 하였고,(『연산군일기』 10년 3월 26일) 이에 정귀인의 아버지인 정인석은 참형(斬刑)에 처해졌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4월 1일 7번째기사] 연산군은 정귀인의 아버지인 정인석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강 건너로 날리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26일)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귀인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1년 10월 27일) 또한 정귀인에게 3년 동안 제물(祭物)을 마련하여 제급할 것을 지시하였다.(『중종실록』 1년 11월 11일)
묘소와 후손
정귀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있다.
정귀인은 성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1자인 안양군이항은 능천군(綾川君)구수영(具壽永)의 딸인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능성 구씨(綾城具氏)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2자인 봉안군이봉은 조성기(趙成紀)의 딸인 의춘군부인(宜春郡夫人)평양 조씨(平壤趙氏)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는데, 바로 흥원군(興原君)이경(李瓊)이다. 1녀인 정혜옹주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한형윤(韓亨允)의 아들인 청평위(淸平尉)한기(韓紀)와 결혼하였는데,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