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朴宗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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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3년(광해군 5) = ?]. 조선 중기 광해군 때 활동한 무신, 군관(軍官)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젊어서부터 군관(軍官)이 되어, 남북병영(南北兵營)에 출입한 지 20여년이 되었으므로 그 자취가 분명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그는 일찍이 이경준(李耕俊)을 알고 지내게 되었고, 그와의 인연으로 정승 박순(朴淳)의 서자(庶子) 박응서(朴應犀)를 만났다. 박응서가 명현(名賢)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박종인은 박응서를 대여섯 차례 왕래하며 만났는데, 이것이 화가 되어 1613년(광해군 5) <박응서의 옥사>, 곧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었다. 그 해 5월 4일 억울하게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하였고 그가 거주하던 홍천(洪川)의 수령이 파직되었으며 홍천의 읍호도 강등되었다.

1613년(광해군 5) 3월 문경(聞慶) 새재[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절도 사건이 박응서 일당이 한 짓으로 발각되어 그 해 4월에 박응서는 그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그런데 박응서가 사형수로 있을 때 화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의 비밀스런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소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이 모반을 꾸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우려 하고 있다.” 라고 날조하였다. 이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에 유배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은 사형되었으며, 그 외 소북파(小北派)들이 숙청당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7서 일당(七庶一黨)이 모두 연루되어 치죄되었으나 박응서 혼자만 죄가 용서되어 그 해 11월에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