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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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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왕대비 |
한글표제 | 왕대비 |
한자표제 | 王大妃 |
상위어 | 대왕대비(大王大妃) |
하위어 | 내명부(內命婦), 왕비(王妃), 왕세자빈(王世子嬪) |
동의어 | 대비(大妃), 자성(慈聖), 자전(慈殿) |
관련어 | 왕후(王后), 태비(太妃) |
분야 | 왕실/왕실구성원/비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한자표제 |
집필자 | 임혜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왕대비(王大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6년 1월 6일, 『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
전왕(前王)의 왕비(王妃)가 생존해 있을 때의 호칭 혹은 지위.
개설
왕대비(王大妃)는 전왕의 왕비로서, 배우자였던 왕이 사망하고 후사왕이 즉위한 후 존숭되었다. 중국의 황태후(皇太后)를 제후국의 지위에 맞게 왕대비로 고친 것이다. 대개 왕의 어머니가 왕대비가 되지만, 왕과의 관계보다는 선왕(先王)의 왕비들 간의 서열과 차서에 따라 그 지위가 정해졌다. 왕대비는 전왕의 정비(正妃)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후궁(後宮)은 아들이 즉위하였더라도 왕대비가 될 수 없었다. 대비(大妃)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였고, 자전(慈殿), 자성(慈聖)으로 호칭하였으며, 왕대비의 하교를 자교(慈敎)·자지(慈旨)·의지(懿旨)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에서 왕대비는 정종비정안왕후(定安王后)가 최초였다. 태종이 즉위한 후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로 존숭되었는데, 이처럼 존호와 함께 부르던 것은 선조 이후로는 사라졌다. 왕비는 되지 못하였으면서 왕대비가 된 경우도 있다. 덕종비소혜왕후(昭惠王后)와 익종비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이들은 남편이 왕세자로 승하하였으나 아들이 즉위하여 남편을 추숭하게 되면서 왕대비가 된 경우이다.
왕대비의 역할은 내치를 담당한 왕비보다는 크지 않으나 정치적인 영향력은 그보다 컸다. 특히 후사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승하했을 경우 사왕(嗣王)을 결정하거나, 반정(反正)이 발생하였을 때 교지(敎旨)를 통해 왕의 교체를 하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왕세자빈이나 왕비를 간택할 때 왕대비의 결정이 중요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세종이나 문종과 같이 계비(繼妃)를 맞이하지 않아 왕대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대신 존호와 함께 존숭하여 정안왕후 이외에도 원경왕후는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불렸으며, 세조비정희왕후는 자성왕태비(慈聖王太妃)라고 존숭되었다.
성종대에는 예종비안순왕후(安順王后)가 왕대비가 되었으나, 덕종(德宗)의 추숭으로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가 왕대비가 되면서 두 분의 왕대비에 대한 호칭과 차서의 논의가 있었다. 소혜왕후는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 안순왕후는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봉했으며, 차서는 형제의 차서를 따라 소혜왕후가 더 높았다(『성종실록』6년 1월 6일). 선조가 즉위한 후 전전왕(前前王)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仁聖王后)를 대왕대비로 높이지 않고, 형제의 항렬을 따라 명종비인순왕후(仁順王后)와 함께 왕대비로 존숭하게 되자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와 의성왕대비(懿聖王大妃)로 봉한 사례가 있다. 19세기 철종대에 이처럼 왕대비가 여러 분인 경우가 있었다. 이때에는 왕의 순서를 따라 순조비순원왕후(純元王后)가 대왕대비, 익종비신정왕후가 왕대비, 현종비효정왕후(孝定王后)는 대비(大妃)로 칭하여 차서를 구분하였다. 고종대에도 신정왕후가 대왕대비, 효정왕후가 왕대비, 그리고 철종비철인왕후(哲仁王后)는 대비로 구분하였던 것이 조선전기와 차이점이다.
왕대비의 정치적 역할은 왕비보다 컸다. 정희왕후는 예종이 승하하자 왕대비로서 성종을 즉위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중종반정 때에는 성종비정현왕후(貞顯王后)의 교지를 받아 중종을 옹립할 수 있었으며, 인조반정 역시 선조비인목왕후(仁穆王后)의 교지가 가장 큰 명분이 될 수 있었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현종비명성왕후(明聖王后)는 숙종대 왕대비로서 홍수의 변[紅袖之變]을 통해 왕실 종친 세력을 제거하거나,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송시열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언찰(諺札)을 보내는 등 정치적 참여를 하였다. 숙종비인원왕후(仁元王后)는 경종대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도록 언문 교서를 하교하였고, 신축환국 이후 언교(諺敎)를 통해 연잉군건저(建儲)의 정당성을 확인하여 영조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변원림, 『조선의 왕후』, 일지사, 2006.
- 임혜련, 「朝鮮 肅宗妃 仁元王后의 嘉禮와 정치적 역할」, 『한국인물사연구』 13, 2010.
- 한희숙, 「朝鮮初期 昭惠王后의 생애와 『內訓』」, 『한국사상과문화』 2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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