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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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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희전 |
한글표제 | 영희전 |
한자표제 | 永禧殿 |
대역어 | 진전(眞殿) |
동의어 | 남별전(南別殿) |
관련어 | 경기전(慶基殿), 계명전(啓命殿), 목청전(穆淸殿), 봉선전(奉先殿), 선원전(璿源殿), 영숭전(永崇殿), 준원전(濬源殿), 집경전(集慶殿) |
분야 | 왕실/왕실의례/가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지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희전(永禧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14년 3월 3일, 『숙종실록』 16년 10월 27일, 『영조실록』 24년 1월 17일, 『정조실록』 2년 7월 11일, 『철종실록』 9년 6월 25일, 『고종실록』 37년 5월 28일 |
조선 숙종대에 정비된 도성 내의 진전(眞殿).
개설
조선시대에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진전제도는 크게 태조의 어진을 보관하는 각처의 태조 진전과 태조 이하 역대 국왕과 왕후의 어진을 보관하는 서울의 선원전(璿源殿)으로 나누어 마련하였다. 태조 진전은 모두 6곳을 건립하였는데 서울의 문소전(文昭殿), 영흥 준원전(濬源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등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함락되고, 경복궁이 불타면서 선원전의 어진은 모두 소실되었다. 외방의 태조 진전 또한 다수 파괴되고 준원전과 경기전의 어진만 무사히 보전되었다. 도성 안의 태조 진전은 재건되지 못하고, 전란 후에도 보전된 세조와 원종 어진을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해 두고 있었다. 숙종대에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옮겨 그려 남별전에 봉안하여 도성 내에 태조 진전을 복구했는데, 이곳이 영희전이다.
성립 경위
남별전은 임진왜란 후 보전된 태조와 세조 어진을 임시로 봉안한 장소로 출발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남별전의 두 어진은 무사히 보전되었고, 강화부(江華府)에 영숭전을 건립한 후 옮겼다. 1636년(인조 14) 강화부 영숭전의 태조 어진은 소실되었고, 세조 어진은 성 밖에서 찾아 원종의 어진을 모신 서울의 숭은전(崇恩殿)에 봉안하였다가 남별전을 중수한 후 옮겼다. 1677년(숙종 3)에는 서울의 남별전을 증축하여 세우고, 1688년(숙종 14)에 남별전의 늘어난 한 칸에 태조 어진을 새로 봉안하였다(『숙종실록』 14년 3월 3일). 1688년 당시 태조 영정은 영흥의 준원전과 전주의 경기전 2곳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경기전의 영정을 옮겨서 모사한 후 남별전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690년(숙종 16) 외방에 있는 태조 진전은 모두 전호(殿號)가 있는데 서울의 태조 진전만 전호가 없다 하여 새로 진전의 이름을 의논한 후 영희전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숙종실록』 16년 10월 27일).
변천
1748년(영조 24) 영조는 3실로 되어 있던 영희전을 중건하여 5실로 만들고,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숙종의 어진을 토대로 2본을 새로 모사한 후, 그중의 하나를 영희전 제4실에 모셨다(『영조실록』 24년 1월 17일). 1777년(정조 2) 정조는 13본에 이르는 영조의 어진 중 창의궁(彰義宮)·육상궁(毓祥宮)·강화부에 있던 어진을 제외하고, 태녕전(泰寧殿)에 있던 1744년 갑자년 면복본을 영희전에 봉안하고, 나머지는 창덕궁의 선원전에 봉안하였다(『정조실록』 2년 7월 11일). 이후 순조대, 헌종대까지도 영희전은 5실 체제를 유지하였다. 진전의 실수(實數)를 마구 늘려 종묘와 같이 하지 말라는 영조의 유지에 의한 것이었다. 1857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의 국장 중에 순조의 묘호를 순종에서 순조로 바꾼 후 영희전을 증건하고, 제6실에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철종실록』 9년 6월 25일).
1872년(고종 9) 개국 후 8번째 주갑을 기념하여 고종은 태조와 태종의 존호를 올리고, 영희전 제1실의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1899년(광무 3)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장종으로 추숭하여 부묘하였고, 영희전은 옛 경모궁(景慕宮) 자리로 이전하였다. 본래 영희전이 자리한 지역은 1885년(고종 22) 한성조약 이후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상권이 확대일로에 있었다. 1898년(광무 2)에는 명동성당이 영희전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건립되면서 왕실의 제향 장소로서의 위상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00년(광무 4) 5월 28일 새 영희전 각 실에 어진을 옮겨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5월 28일).
1907년(융희 1)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에 의해 영희전, 목청전, 화령전(華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 성일헌(誠一軒) 등 진전과 어진 봉안각에 모신 어진들을 선원전으로 옮겼다. 또 냉천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각들을 모두 국유화하면서 진전으로서 영희전의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太祖影幀模寫都監儀軌)』
- 『숙종영정모사도감의궤(肅宗影幀模寫都監儀軌)』
- 『남전증건도감의궤(南殿增建都監儀軌)』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26,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