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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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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연복 |
한글표제 | 연복 |
한자표제 | 延卜 |
관련어 | 난두배(欄頭輩), 사행원역(使行員役), 책문교역(柵門交易) |
분야 | 경제/산업/상업·무역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철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연복(延卜) |
짐을 싣지 않은 말을 책문으로 들여보내 사행 원역의 물건을 운반해오는 제도.
개설
연복(延卜)은 조선 사행의 북경 파견 과정에서 생겨났다. 조선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 만나는 도시는 북서쪽으로 120리 떨어진 책문이었다. 조선 사행은 이곳에서 실질적인 출입국 절차를 밟았다. 북경에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입책(入柵) 혹은 출책(出柵)이란 용어가 생겨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곳에서 조선 사행은 의주에서 싣고 온 짐들을 풀어놓았다. 이후 이 짐은 청의 운송업자 난두배(欄頭輩)가 맡아 북경까지 운반하였다. 반대로 북경에서 책문까지의 짐도 난두배가 맡아 운송하였다. 따라서 책문을 나와 의주까지는 사행 일행의 짐을 운반할 말과 사람이 필요하였다.
연복은 바로 이때 의주부에서 사행 원역의 짐을 책문으로부터 실어 내올 말을 파견하던 제도였다. 그러나 역관과 사상들은 연복을 이용하여 많은 은화를 책문으로 가지고 들어가 교역하고, 다시 사행 원역의 짐이라고 핑계하여 물건을 반입하는 대청무역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이에 연복법은 경제사적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
내용 및 변천
사행 원역은 정관(正官) 즉 사행의 임무를 띤 정식 관원을 말하는데, 동지행(冬至行)의 경우 그 수는 35명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들을 수행하는 마부(馬夫)·노자(奴子)·구인(驅人) 등의 인원만도 220여 명, 말은 200여 필이었다. 이 밖에 심양에서 방물 세폐를 내려놓고 돌아오는 말도 250여 필에 이르렀다. 이들은 압록강-책문-봉황성-심양-산해관-북경을 오고가는 5~6개월의 긴 여정을 소화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역관과 상인은 수시로 청 측 상인과 접촉하면서 교역하였는데, 책문·심양·북경에서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였다. 연복제는 이 가운데 책문무역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책문은 청과 조선 사이의 범월을 막기 위해 쌓은 울타리가 있던 곳으로, 봉황성장 관할하의 관소(關所)였다. 그런데 책문에서는 조선 사행이 드나드는 때에 맞추어 중국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조선 사신단이 여마(餘馬)·연복과 같은 제도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물품을 가지고 들어와 활발히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마는 말 그대로 여분의 말을 들여보내는 것이다. 사행 원역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들어가는 중에 방물과 세폐를 실은 말이 혹 쓰러질 것에 대비한 것이다. 그 한도는 10여 태(太) 정도의 짐을 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의주부에서는 사상들에게 은화를 받고 여마의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 이 여마에 짐을 잔뜩 실어 보냈는데, 경우에 따라 그 수는 1천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여마로 책문에서의 불법 거래가 크게 늘자 정부는 1707년(숙종 33) 방물세폐를 실은 말의 숫자를 제한하는 한편 사행이 책문에 들어가고 나올 때 짐을 일제히 조사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후 여마에 의한 책문무역은 점차 쇠퇴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성황을 이룬 것이 연복에 의한 책문교역이다. 연복으로 파견되는 말에 은화를 잔뜩 실어 가서 교역하고 다시 면세 및 수검에 혜택을 보는 사행원역의 짐임을 핑계로 의주부로 들어왔다. 연복을 이용한 무역은 단련사(團練使)의 왕복 과정에도 일어났다. 단련사는 심양 성경부에 방물과 세폐를 바치고 되돌아오는 인마를 인솔하는 임무를 띤 직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책문에서 중국의 물화를 많이 사들여, 단련사가 책문을 나올 때도 사행과 같이 연복제가 활용되었던 것이다.
의의
17세기 연복을 이용한 무역에는 역관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의주 상인, 개성 상인, 서울 상인 등의 사상층이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몇 차례 치폐가 거듭되었지만, 책문후시(柵門後市)로 불법시 되던 교역은 1707년(숙종 33) 후시에 참여하는 상인을 조사하고 교역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공인되었다. 연복은 조선후기 무역을 통해 사상층의 자본을 성장시키고 국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편으로써 기능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유승주·이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유승주,「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과정-17·18세기 부연역관의 무역활동을 중심으로」, 『백산학보』8, 1970
- 이철성,『朝鮮後期 對淸貿易史 硏究』, 국학자료원, 2000
- 이철성,「18세기 후반 조선의 대청무역 실태와 사상층의 성장-모자무역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94,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