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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쌍계사|한글표제=쌍계사|한자표제=雙溪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금성현(錦城縣), 나주목(羅州牧), 대동법(大同法), 백면지(白綿紙), 사찰제지(寺刹製紙), 숭선군(崇善君), 승역(僧役), 지역(紙役)|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종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76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qa_11003120_002 『효종실록』 10년 윤3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03005_002 『현종실록』 1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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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백면지를 생산하여 관청에 납품하던 전라도 나주목의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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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선종 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최치원이 은둔했던 경상도 하동의 사찰.
  
 
=='''개설'''==
 
=='''개설'''==
  
쌍계사(雙溪寺)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에 있는 폐사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금성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암군에 속하게 되었다. 쌍계사는 조선후기에 백면지(白綿紙)를 생산하여 관청에 납품하던 사찰이다. 당시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지방 관청의 제지소(製紙所)가 쇠퇴하였고, 그에 따라 종이 제작은 주로 사찰에서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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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雙溪寺)는 신라삼법(三法) 화상(和尙)이 수행하고, 진감(眞鑑) 국사(國師) 혜소(慧昭)가 선문(禪門)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처음에 옥천사(玉泉寺)라고 불렀지만 인근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어서 왕이 ‘쌍계사’라는 제액을 하사하였다. 신라말 최치원이 은둔하면서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글씨를 남겼고 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鑑禪師大空塔碑文)을 썼다. 쌍계사는 조선중후기에 중창되었고, 유학자들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주요한 행선지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1) 관할 행정 구역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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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건
  
금성현(錦城縣) 쌍계사는 오늘날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는 폐사지를 말한다. 금성현은 나주목(羅州牧)의 다른 이름으로, 1645년(인조 23)에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나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또 이듬해인 1655년(효종 6)에 다시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64년(현종 5)에 나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1895년에 나주목의 일부 지역이 영암군으로 편입되었고, 쌍계사가 영암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이다. 금정면은 조선시대에 나주군 금마면(金磨面)과 원정면(元井面) 지역이었으나 1895년에 영암군에 편입되면서 금마면의 ‘금()’ 자와 원정면의 ‘정()’ 자를 따서 금정면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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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동(花開洞)에 소재한 쌍계사는 723년(신라 성덕왕 22)에 의상(義湘)의 제자로 알려진 삼법(三法) 화상(和尙)이 처음으로 터를 닦아 수행하였다고 하며, 진감 국사 혜소가 그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음으로써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혜소는 법당을 갖춘 후에 옥천사(玉泉寺)라고 이름 붙이고 선문(禪門)을 개창하여 수행자들을 지도하였다. 그런데 근처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쌍계사(雙溪寺)’라는 제액(題額)을 별도로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절 이름이 쌍계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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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조정상탑에 얽힌 이야기
  
쌍계사는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백운(白雲) 대사가 창건하고, 1065년(고려 문종 19)에 호호(浩浩) 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하지만 문헌적 근거는 없다. 인근의 덕룡산 불회사(佛會寺)와 운흥사(雲興寺)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알려져 있으므로 쌍계사 역시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쌍계사지에는 석장승과 기둥돌 등 여러 파편들이 그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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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에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신라 출신 삼법 화상은 810년에 중국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830년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귀국할 때 김대비(金大悲)와 공모하여 육조 대사 혜능(慧能)의 머리 유골인 정상(頂相)을 훔쳐 왔다. 신라로 돌아온 삼법 화상은 겨울에도 등꽃이 만발한 지리산 화개계곡에 정착하여 수행하다가 입적하였다. 훗날 그곳에 혜소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육조 대사의 영당(影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3)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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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육조정상의 절취 사건과 관련하여, 732년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에서는 보적(普寂) 선사(禪師)가 자객 장행창(張行昌)을 사주하여 혜능의 목을 훔치려 했다고 하였고, 781년경의 기록인 『조계대사전(曺溪大師傳)』에서는 자객이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하였다. 801년의 『보림전(寶林傳)』과 952년의 『조당집(祖堂集)』에서는 신라 승려 김대비(金大悲)에게서 돈을 받은 장행만(張行滿)이 혜능의 목을 훔치다가 체포되었지만 방면되었다고 하였고, 988년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신라인에게서 돈을 받은 여주(汝州) 사람이 혜능의 목을 훔치려다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또 1004년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김대비에게서 돈을 받은 장정만(張淨滿)이 혜능의 목을 훔치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효종대에 쌍계사 불상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는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1003120_002 『효종실록』 10년 윤3월 20일]). 당시 불상에서 땀이 나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기 때문에 지방 관아에서 조정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쌍계사에서는 백면지를 생산하여 관청에 납품했는데, 1660년경에 인조의 다섯 째 아들이었던 숭선군(崇善君)이 쌍계사 종이를 독차지한 적이 있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03005_002 『현종실록』 1년 3월 5일]), 숭선군이 왕자였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원망만 할 뿐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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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 속에 삼법 화상과 관련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치원(崔致遠)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에도 그러한 내용이 전하지 않고, 다만 삼법 화상이 수행하던 자리에 당우를 건립하면서 육조영당을 세웠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쌍계사에서 전하는 기록에서는 삼법 화상이 김대비와 함께 공모하여 육조 대사의 정상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 기록은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라고 하는 필사본인데, 이 책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삼법 화상의 육조정상 절취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금 쌍계사에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진감 국사 혜소가 세웠다고 하는 육조영당 자리에, 옛날 쌍계사의 말사였다가 폐사된 목압사(木鴨寺)의 석탑을 1864년(고종 1)에 담월(潭月)과 용담(龍潭)이 옮겨와 육조영당에 안치하였기 때문에 그 석탑을 육조정상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종이를 제작하여 관청에 납품하던 사찰이 많았다. 사찰에서 종이를 제작하던 전통은 신라시대 이래로 사찰에서 경전을 인출하는 일이 잦아지자 자체적으로 종이를 제작하면서 생겨났다. 조선전기까지는 사찰에서의 종이 제작이 자급자족 수준이었으나, 조선후기에 공물을 미곡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관청에서는 종이를 사찰에서 주로 조달하였다. 관청에서 더 이상 직접 종이를 생산하여 상납할 필요성이 사라졌고, 대신에 부족한 종이를 사찰에서 구매하여 충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찰에서는 제지업(製紙業)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였고 그에 따른 불사(佛事)들이 이어졌다. 간혹 종이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에 높은 값을 치르거나 권력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납품처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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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감 국사 혜소의 선문(禪門) 개창과 범패
  
쌍계사 역시 나주목에서 백면지를 전담하여 생산하던 곳이었는데, 현종대에 절에서 납품하던 종이를 숭선군이 독차지함으로써 관청에서 종이를 구매하지 못하게 되고 제때에 상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 쌍계사가 백면지 생산의 주요 사찰이었고, 현종대에 관청에 납품하던 종이를 숭선군에게로 바꿈으로써 문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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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의 후예였던 진감 국사 혜소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선 장사를 하였다. 부모가 죽은 후 31세가 되던 804년에 세공사(歲貢使)의 뱃사공이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길을 가다가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神鑑) 대사(大師)에게 출가하여 남종선(南宗禪)을 배웠으며, 20여 년의 수행을 마치고 830년(신라 흥덕왕 5)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尙州)였는데 차츰 찾아오는 이가 많아지자 지리산 화개곡의 삼법 화상이 세운 절터로 거처를 옮기고 옥천사라고 이름 지었다. 이로써 남종선의 옥천산문(玉泉山門)이 개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남종선은 도의(道義) 국사(國師)가 처음 전래한 이래, 826년에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홍척(洪陟)이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하였고, 837년에 귀국한 원감현욱(圓鑑玄昱)이 봉림산문(鳳林山門)을, 839년에 귀국한 혜철(慧哲)이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혜소가 옥천산문을 개창하였으므로 비교적 초기에 남종선의 산문을 개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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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혜소는 범패(梵唄)를 처음 전래한 선사로 알려져 있다. 범패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불교 음악으로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범패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월명사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는 월명사가 760년(신라 경덕왕 19)에 범성(梵聲)이 익숙하지 못해 향가를 부른다는 기록이 있고, 847년에 일본의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중국 범패를 당풍(唐風), 신라 범패를 향풍(鄕風), 일본 범패를 고풍(古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소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범패가 신라 사회에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범패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진감선사대공탑비」에 있으므로 혜소가 우리나라 범패의 시조로서 추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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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치원의 마지막 은둔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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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유학자 최치원은 중국에서 귀국한 후 정치를 개혁하려 했으나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 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은둔하였다. 그는 전국을 떠돌다가 바위에 글씨를 남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해운대(海雲臺)’와 ‘쌍계석문(雙磎石門)’ 등이 있다. ‘쌍계석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길가의 큰 바위 양쪽에 두 자씩 새겨져 있어서 예로부터 선비들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쌍계사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던 배경이 되었다. 최치원은 마지막에 지리산 청학동에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청학동으로 이야기되는 곳이 바로 쌍계사 뒤쪽에 있는 불일암(佛日庵)과 불일폭포 일대이다. 그래서 쌍계사에는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노닐었다는 청학루(靑鶴樓)가 있고, 또 그의 초상화를 안치한 고운영당(孤雲影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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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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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는 고려시대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전기에는 거의 폐사가 되어 전우(殿宇)가 허물어져 조사전(祖師殿)만 남아 있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중창되면서 쌍계사는 대가람으로 변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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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540년(중종 35)에 승려 중섬(仲暹)이 조정의 허락을 받고 팔영루(八詠樓)를 중수하였고, 1543년(중종 38)에는 승려 혜수(惠修)가 금당 및 동서의 방장실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중창은 지금의 쌍계사 금당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쌍계사는 다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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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인조대에 소요태능(逍遙太能)과 벽암각성(碧巖覺性)이 대웅전·응진당·명왕전·관음전·팔영루와 여러 요사채를 건립하였는데, 이때의 중창은 지금의 쌍계사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진감선사태공탑비가 쌍계사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고, 쌍계사의 사역(寺域)도 금당 영역에서 대웅전 영역으로 넓혀졌다. 하지만 1740년대 이후로는 다시 퇴락하였던 것 같다. 1744년에 황도익(黃道翼)이 쓴 「두류산유행록(頭流山遊行錄)」에서는 "훼손된 전각들이 많아서 절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흉년에다 부역이 많아서 절의 승려들도 감당하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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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쌍계사에서 많은 불서들이 간행되었다. 이 시기에 쌍계사에서 간행된 불서는 대부분 백암성총과 석실명안의 간행 활동과 관련된 서적이다. 성총은 임자도에 표착한 중국 상선에서 얻은 불서를 낙안 징광사와 쌍계사에서 대대적으로 간행하였는데, 쌍계사에서 간행한 『대승기신론소필삭기회편(大乘起信論疏筆削記會編)』(1695)·『육리합석법식통관(六離合釋法式通關)』(1695)·『치문경훈(緇門警訓)』(1695)은 중국본을 토대로 성총이 새로 편찬하여 개판하였으며, 1695년의 『화엄현담회현기(華嚴懸談會玄記)』는 중국본을 복각한 것이다. 그리고 석실명안이 1710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병서연주기회편(般若波羅密多心經略疏竝書連珠記會編)』을 편찬하였으며, 『백우수필(百愚隨筆)』은 1722년에 간행한 그의 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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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쌍계사가 중창된 이후 많은 유학자들이 쌍계사를 거쳐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유람록을 남긴 대표적 유학자로는 조식(曺植), 유몽인(柳夢寅), 성여신(成汝信), 조위한(趙緯韓), 허목(許穆), 오두인(吳斗寅), 김창흡(金昌翕), 황도익(黃道翼) 등이 있는데, 이들에게 쌍계사는 최치원이 은둔했던 청학동의 공간으로써 이상향의 세계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르면 쌍계사에 수십명의 승려들이 거처하며 수행하고 있었고, 또 산내 암자인 칠불암과 불일암에서도 면벽참선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여러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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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편으로 쌍계사는 도적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가 영조와 노론(老論)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豐君)탄(坦)을 왕으로 추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반란군의 일부가 쌍계사에 은신하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3029_004 『영조실록』 4년 3월 29일]) 모두 진압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삼기,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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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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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삼신산쌍계사지』, 성보문화재연구원, 2004.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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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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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형, 「신라 진감선사 범패에 관한 소고」, 『동방학』6,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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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기·박민희, 「지리산 소재 사찰의 조선시대 개판불서 연구」, 『서지학연구』46, 서지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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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17·18세기 하동 쌍계사의 배치와 전각구성의 변화 : 지리산 유람기 분석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
*이종수,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불교학연구』21, 불교학연구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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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2 판



신라시대 선종 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최치원이 은둔했던 경상도 하동의 사찰.

개설

쌍계사(雙溪寺)는 신라삼법(三法) 화상(和尙)이 수행하고, 진감(眞鑑) 국사(國師) 혜소(慧昭)가 선문(禪門)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처음에 옥천사(玉泉寺)라고 불렀지만 인근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어서 왕이 ‘쌍계사’라는 제액을 하사하였다. 신라말 최치원이 은둔하면서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글씨를 남겼고 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鑑禪師大空塔碑文)을 썼다. 쌍계사는 조선중후기에 중창되었고, 유학자들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주요한 행선지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동(花開洞)에 소재한 쌍계사는 723년(신라 성덕왕 22)에 의상(義湘)의 제자로 알려진 삼법(三法) 화상(和尙)이 처음으로 터를 닦아 수행하였다고 하며, 진감 국사 혜소가 그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음으로써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혜소는 법당을 갖춘 후에 옥천사(玉泉寺)라고 이름 붙이고 선문(禪門)을 개창하여 수행자들을 지도하였다. 그런데 근처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쌍계사(雙溪寺)’라는 제액(題額)을 별도로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절 이름이 쌍계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육조정상탑에 얽힌 이야기

쌍계사에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신라 출신 삼법 화상은 810년에 중국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830년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귀국할 때 김대비(金大悲)와 공모하여 육조 대사 혜능(慧能)의 머리 유골인 정상(頂相)을 훔쳐 왔다. 신라로 돌아온 삼법 화상은 겨울에도 등꽃이 만발한 지리산 화개계곡에 정착하여 수행하다가 입적하였다. 훗날 그곳에 혜소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육조 대사의 영당(影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조정상의 절취 사건과 관련하여, 732년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에서는 보적(普寂) 선사(禪師)가 자객 장행창(張行昌)을 사주하여 혜능의 목을 훔치려 했다고 하였고, 781년경의 기록인 『조계대사전(曺溪大師傳)』에서는 자객이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하였다. 801년의 『보림전(寶林傳)』과 952년의 『조당집(祖堂集)』에서는 신라 승려 김대비(金大悲)에게서 돈을 받은 장행만(張行滿)이 혜능의 목을 훔치다가 체포되었지만 방면되었다고 하였고, 988년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신라인에게서 돈을 받은 여주(汝州) 사람이 혜능의 목을 훔치려다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또 1004년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김대비에게서 돈을 받은 장정만(張淨滿)이 혜능의 목을 훔치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 속에 삼법 화상과 관련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치원(崔致遠)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에도 그러한 내용이 전하지 않고, 다만 삼법 화상이 수행하던 자리에 당우를 건립하면서 육조영당을 세웠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쌍계사에서 전하는 기록에서는 삼법 화상이 김대비와 함께 공모하여 육조 대사의 정상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 기록은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라고 하는 필사본인데, 이 책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삼법 화상의 육조정상 절취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금 쌍계사에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진감 국사 혜소가 세웠다고 하는 육조영당 자리에, 옛날 쌍계사의 말사였다가 폐사된 목압사(木鴨寺)의 석탑을 1864년(고종 1)에 담월(潭月)과 용담(龍潭)이 옮겨와 육조영당에 안치하였기 때문에 그 석탑을 육조정상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 진감 국사 혜소의 선문(禪門) 개창과 범패

고구려 유민의 후예였던 진감 국사 혜소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선 장사를 하였다. 부모가 죽은 후 31세가 되던 804년에 세공사(歲貢使)의 뱃사공이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길을 가다가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神鑑) 대사(大師)에게 출가하여 남종선(南宗禪)을 배웠으며, 20여 년의 수행을 마치고 830년(신라 흥덕왕 5)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尙州)였는데 차츰 찾아오는 이가 많아지자 지리산 화개곡의 삼법 화상이 세운 절터로 거처를 옮기고 옥천사라고 이름 지었다. 이로써 남종선의 옥천산문(玉泉山門)이 개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남종선은 도의(道義) 국사(國師)가 처음 전래한 이래, 826년에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홍척(洪陟)이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하였고, 837년에 귀국한 원감현욱(圓鑑玄昱)이 봉림산문(鳳林山門)을, 839년에 귀국한 혜철(慧哲)이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혜소가 옥천산문을 개창하였으므로 비교적 초기에 남종선의 산문을 개창한 것이다.

또한 혜소는 범패(梵唄)를 처음 전래한 선사로 알려져 있다. 범패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불교 음악으로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범패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월명사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는 월명사가 760년(신라 경덕왕 19)에 범성(梵聲)이 익숙하지 못해 향가를 부른다는 기록이 있고, 847년에 일본의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중국 범패를 당풍(唐風), 신라 범패를 향풍(鄕風), 일본 범패를 고풍(古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소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범패가 신라 사회에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범패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진감선사대공탑비」에 있으므로 혜소가 우리나라 범패의 시조로서 추앙되고 있다.

(4) 최치원의 마지막 은둔처

신라말 유학자 최치원은 중국에서 귀국한 후 정치를 개혁하려 했으나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 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은둔하였다. 그는 전국을 떠돌다가 바위에 글씨를 남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해운대(海雲臺)’와 ‘쌍계석문(雙磎石門)’ 등이 있다. ‘쌍계석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길가의 큰 바위 양쪽에 두 자씩 새겨져 있어서 예로부터 선비들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쌍계사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던 배경이 되었다. 최치원은 마지막에 지리산 청학동에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청학동으로 이야기되는 곳이 바로 쌍계사 뒤쪽에 있는 불일암(佛日庵)과 불일폭포 일대이다. 그래서 쌍계사에는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노닐었다는 청학루(靑鶴樓)가 있고, 또 그의 초상화를 안치한 고운영당(孤雲影堂)이 있다.

(5) 조선시대

쌍계사는 고려시대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전기에는 거의 폐사가 되어 전우(殿宇)가 허물어져 조사전(祖師殿)만 남아 있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중창되면서 쌍계사는 대가람으로 변모되었다.

먼저 1540년(중종 35)에 승려 중섬(仲暹)이 조정의 허락을 받고 팔영루(八詠樓)를 중수하였고, 1543년(중종 38)에는 승려 혜수(惠修)가 금당 및 동서의 방장실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중창은 지금의 쌍계사 금당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쌍계사는 다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 후 인조대에 소요태능(逍遙太能)과 벽암각성(碧巖覺性)이 대웅전·응진당·명왕전·관음전·팔영루와 여러 요사채를 건립하였는데, 이때의 중창은 지금의 쌍계사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진감선사태공탑비가 쌍계사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고, 쌍계사의 사역(寺域)도 금당 영역에서 대웅전 영역으로 넓혀졌다. 하지만 1740년대 이후로는 다시 퇴락하였던 것 같다. 1744년에 황도익(黃道翼)이 쓴 「두류산유행록(頭流山遊行錄)」에서는 "훼손된 전각들이 많아서 절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흉년에다 부역이 많아서 절의 승려들도 감당하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편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쌍계사에서 많은 불서들이 간행되었다. 이 시기에 쌍계사에서 간행된 불서는 대부분 백암성총과 석실명안의 간행 활동과 관련된 서적이다. 성총은 임자도에 표착한 중국 상선에서 얻은 불서를 낙안 징광사와 쌍계사에서 대대적으로 간행하였는데, 쌍계사에서 간행한 『대승기신론소필삭기회편(大乘起信論疏筆削記會編)』(1695)·『육리합석법식통관(六離合釋法式通關)』(1695)·『치문경훈(緇門警訓)』(1695)은 중국본을 토대로 성총이 새로 편찬하여 개판하였으며, 1695년의 『화엄현담회현기(華嚴懸談會玄記)』는 중국본을 복각한 것이다. 그리고 석실명안이 1710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병서연주기회편(般若波羅密多心經略疏竝書連珠記會編)』을 편찬하였으며, 『백우수필(百愚隨筆)』은 1722년에 간행한 그의 문집이다.

조선후기 쌍계사가 중창된 이후 많은 유학자들이 쌍계사를 거쳐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유람록을 남긴 대표적 유학자로는 조식(曺植), 유몽인(柳夢寅), 성여신(成汝信), 조위한(趙緯韓), 허목(許穆), 오두인(吳斗寅), 김창흡(金昌翕), 황도익(黃道翼) 등이 있는데, 이들에게 쌍계사는 최치원이 은둔했던 청학동의 공간으로써 이상향의 세계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르면 쌍계사에 수십명의 승려들이 거처하며 수행하고 있었고, 또 산내 암자인 칠불암과 불일암에서도 면벽참선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여러명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쌍계사는 도적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가 영조와 노론(老論)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豐君)탄(坦)을 왕으로 추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반란군의 일부가 쌍계사에 은신하다가(『영조실록』 4년 3월 29일) 모두 진압되었다.

참고문헌

  •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 쌍계사, 『삼신산쌍계사지』, 성보문화재연구원, 2004.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백일형, 「신라 진감선사 범패에 관한 소고」, 『동방학』6,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00.
  • 송일기·박민희, 「지리산 소재 사찰의 조선시대 개판불서 연구」, 『서지학연구』46, 서지학회, 2010.
  • 이영운, 「17·18세기 하동 쌍계사의 배치와 전각구성의 변화 : 지리산 유람기 분석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 이종수,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불교학연구』21, 불교학연구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