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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1 기준 최신판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문과의 첫 번째 단계 시험.

개설

식년시는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실시하는 시험이었다. 문과는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3단계로 이루어졌다. 식년시의 초시는 식년 전해인 인(寅)·신(申)·사(巳)·해(亥)의 상식년 가을에 실시하였다. 초시는 거주지에서 보아야 했다. 서울 거주자는 서울에서, 지방 거주자는 거주하는 도(道)에서 응시해야 했다. 초시에 합격해야 식년 봄에 실시하는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자·오·묘·유년에 실시한 시험이었다. 식년시는 문과뿐 아니라 무과·생원진사시·잡과에 모두 설행되었다. 여러 과거를 몰아서 실시하면 시간이 촉박하여 시험의 관리나 준비에서 어려움이 따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초시는 식년 전해인 인·신·사·해(寅·申·巳·亥)년에 실시하고 복시와 전시는 식년에 실시하였다.

문과초시에는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가 있는데 어떤 시험을 보느냐는 응시자의 거주지에 따라서 정하여졌다. 관시는 생원·진사로 성균관에 기거하며 원점(圓點) 300점을 딴 사람에게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서울 거주자는 한성시에 응시하였고, 지방 거주자는 각 도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응시하였다. 현직 관리는 향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시험 장소는 관시는 성균관에서 실시하여 일정하였으나 한성시는 일정하지 않았다. 한성부·장악원·예조 가운데 1곳과 사부학당 가운데 한 곳에 시험장이 설치되었다. 1소(所)와 2소로 나뉘어 시행되어 시관(試官)과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있는 사람들도 같은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향시는 관찰사가 도내의 군현 가운데 정하였는데 한 곳에서만 하지 않고 돌아가며 맡게 하였다. 향시의 시험 장소도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경기·경상·전라·충청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평안·함경도는 남·북도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시관은 관시와 한성시는 각각 정3품 이하 관원 3명씩을 임명하여 시취(試取)하게 하고 감찰 각 1명이 시험을 감독하였다. 향시는 각 도의 도사(都事)가 시관이 되어 시취하였는데, 경상좌도와 평안남도의 경우는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을 파견하였고, 함경남도는 평사(評事)가 시취하였다. 참시관(參試官) 2명은 관찰사가 문신 수령 2명을 뽑아 보냈다.

초시에 응시하려면 먼저 녹명(錄名)을 해야 했다. 녹명은 응시자의 응시 자격을 심사하여 응시 원서를 접수하는 것을 말하였다. 시험 열흘 전에 마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기에는 시험장에 들어갈 때 하는 일이 많았다. 녹명은 관시는 성균관이, 한성시는 한성부와 예문관·성균관·승문원·교서관의 7품 이하의 관원 각 1명이 담당하였고, 향시는 각 도의 관찰사가 정한 차사원이 담당하였다.

응시자는 해당 시험 장소에 가서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하여야 했다. 사조단자는 응시자의 성명, 본관, 거주지, 부·조·증조의 관직 및 이름, 외조의 관직·이름·본관을 기록한 것이었다. 보단자는 6품 이상의 관리가 서압한 신원 보증서였다.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접수한 녹명관은 신원을 확인한 후 녹명책에 기입하고 응시자가 준비한 시험지에 확인 도장을 찍어 준 뒤 시소를 배정해 주었다.

식년문과초시는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으로 이루어져 있어 3번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 과목은 초장에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대상으로 의(疑)·의(義) 또는 논(論) 중에서 2편을 제술하였다. 중장은 부(賦)·송(頌)·명(銘)·잠(箴)·기(記) 중 1편, 표(表)·전(箋) 중에 1편을 선택하여 모두 2편을 제술로 시험하였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을 제술로 시험하였다.

합격 정원은 관시는 50명, 한성시는 40명, 향시는 150명으로 총 240명이었다. 향시는 지역별로 정원이 달랐다. 경기도 20명, 충청·전라도 각 25명, 경상도 30명, 강원·평안도 각 15명, 황해·영안도 각 10명이었다.

변천

식년시의 절차나 시험 방법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합격 정원이 조정되었는데 1593년(선조 26)에 경기도 향시를 폐지하고 정원 20명을 한성시 정원에 합쳐 한성시 인원이 60명으로 늘어났다. 『속대전』에서는 함경도의 정원이 10명에서 13명으로 늘어나 초시 합격 정원은 모두 243명이 되었다.

시험 과목에서 초장의 5경의와 중장의 송·명·잠·기가 폐지되어, 초장은 4서의 의(疑)·의(義) 1편과 논(論) 1편으로 되었고 중장은 부(賦) 1편, 표·전 중 1편으로 축소되었다.

중종 이후에는 4조(祖) 안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현관(縣官)이 없는 경우에는 지방 응시자는 경재소 관원 3명, 서울의 응시자는 해당 부(部)의 관원 3명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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