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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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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약군 |
한글표제 | 약군 |
한자표제 | 若君 |
상위어 | 강호(江戶, [에도])시대, 막부(幕府, [바쿠후]) |
관련어 | 관백(關白), 대군(大君)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일본/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영조 |
집필자 | 백옥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약군(若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8년 4월 19일 |
일본관백(關白) 곧 장군(將軍, 쇼군)의 아들에 대한 호칭.
내용
관백(關白)을 대군(大君)으로 부르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에서는 관백의 아내를 ‘어대양(御臺樣, [미다이사마])’라 부르고, 뒤를 이을 아들은 ‘약군양(若君樣, [와카가미사마])’라 하였다. 조선에서도 이에 따라 관백의 아들을 약군으로 칭하였던 듯하다.
조선후기에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에는 대군에게는 국서(國書)와 예물을, 약군에게는 예물을 준비하였다. 약군을 위한 예물로는 매 10마리, 준마(駿馬) 안장 2필, 호피(虎皮) 10장, 표피(豹皮) 15장, 인삼 30근, 비단 10필, 능자(綾子) 20필, 색대사(色大紗) 10필, 색필(色筆) 50자루, 참먹 50개, 청서피(靑鼠皮) 15장, 어피(魚皮) 100장, 꽃무늬 벼루 5개 등이 있었다. 한편 통신사 일행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는 관백과 함께 약군도 사신 일행에게 은자(銀子)를 보내왔다.
조선에서 약군에게 예물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1643년(인조 21)부터였다. 당시 대마도에서는 관백이 늦게 아들을 얻었다는 이유로 축하 사절을 청하면서 예단과 서계(書契)를 약군에게 내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예단은 허락하고 서계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 전례가 되었다. 1711년(숙종 37년) 관백의 아들이 아직 정식으로 책봉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단을 없앤 뒤 그것이 규례가 되었다고 하지만, 약군에 대한 예단은 영조대에도 계속되었다.
용례
政院 以備邊司降倭供招 啓曰 臣持酒饌 與譯官朴大根 往饋降倭助四郞老古汝文等十一名 而探其事情 則對曰 (중략) 又問 關白 年歲幾何 而有子女否耶 對曰 年五十九 上年 自征關東之時 三歲之兒死 其後娶少婦 有二歲兒 名曰若君(『선조실록』 28년 4월 19일)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