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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0 기준 최신판



국가에서 사찰에 분급하여 준 토지.

개설

사사전은 사원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사원전은 면세의 특권이 있던 토지였는데, 조선 태종대 각 사원전을 정리·통합하면서 수조권을 분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과전 및 직전 등과 마찬가지로 수취한 전조에서 매 결마다 2두의 세(稅)를 거두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6세기 이후 사사전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데, 15세기 말을 기점으로 사사전의 규모가 점차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 및 특징

사사전에 대한 지급과 수취 규정을 정비한 것은 1402년(태종 2)이었다.(『태종실록』 2년 2월 5일). 태종은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던 불교를 조계종·화엄종의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혁파하지 않고 남겨 놓을 사찰을 기록한 장부인 밀기(密記)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밀기에 기록된 사찰들을 대상으로 사사전을 지급하였다. 사사전은 수조권을 가지는 토지로서 기본적인 성격은 과전이나 공신전 등의 토지와 같았다. 즉, 매 1결당 30두의 전조를 수취하는 것이며, 그 수취 안에서 1결당 전세를 국가에 납입하도록 하였다. 태종대 규정이 정비될 당시 전체 사사전은 약 4,600여 결 정도였다. 이는 앞선 고려시대에 비하면 대폭 줄어든 것이었다.

변천

태종대 사사전의 규정이 정비된 이후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관료들은 사사전을 국가에 환수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으나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조대를 지나 성종대에 이르면 사사전의 전체 규모가 10,000여 결에 이르렀다. 세종 말년부터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친불교적 성격으로 인하여 사사전을 활발하게 지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종대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사전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명종실록』 8년 6월 6일). 16세기 직전(職田) 분급이 중단되고 국가에서 더 이상 토지 수조권을 분급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사사전 역시 축소·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국가를 천명한 조선에서 사사전을 지급하여 사찰을 경제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명분상 큰 약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전은 15세기~16세기 초반까지 제도적 명맥을 유지해 갔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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