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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진(秦)나라 승상인 이사(李斯)가 정리한 전서체.

개설

소전(小篆)은 글자의 크기에 관한 명칭이 아니라, 통일 진나라 이전에 쓰였던 전서체인 갑골문·금문·고문·주문을 포괄하는 대전(大篆)과 대비해 부르는 이름이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하고 교통과 통신의 편리를 위하여 “글씨는 같은 문자로 쓰고, 수레는 같은 바퀴로 한다[書同文, 車同軌]”는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정책을 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승상 이사는 문자를 통일시켜 공식 서체로 사용하고 나머지 문자들은 폐기하였다. 진나라의 공식 서체인 소전의 대표적인 자료는 태산(泰山)·낭야대(琅玡臺)·역산(嶧山) 등에 있는 각석(刻石)의 글자가 있다. 소전의 특징은 필획의 굵기가 균일하고 수평과 수직을 이루며 글꼴이 직사각형이면서 필획 간의 간격이 고르고 낱글자의 길이가 가지런하게 규격화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동한(東漢) 시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 “(전국시대) 일곱 나라는 언어는 소리가 다르고 문자는 형체가 달랐다. 진시황이 천하를 합병하자 승상인 이사가 서로 다른 것들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아뢰니, 진나라의 문자와 같지 않은 것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사는 『창힐편(倉頡篇)』을 지었고, 중거부령(中車府令)조고(趙高)는 『원력편(爰歷篇)』을 지었으며, 태사령(太史令)호무경(胡毋敬)은 『박학편(博學篇)』을 지었다. 모두 사주(史籒)의 대전(大篆)을 취하여 생략하거나 고치니, 이를 소전(小篆)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소전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소전이라는 명칭은 갑골문·금문·고문·주문을 포괄하는 대전(大篆)보다 뒤에 생겼다는 의미이다.

소전의 대표적인 자료는 역산·태산·낭야대·지부·갈석·회계에 있는 각석 글자가 있는데, 모두 이사의 글씨라 전해진다. 「태산각석」과 「낭야대각석」만이 진적이어서 진나라 소전의 진면목을 간직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후대에 복각된 것이다. 또한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 9,353자 모두 소전체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설문해자』는 남당과 송나라 시대 서현(徐鉉)과 서개(徐鍇) 형제가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진나라 소전의 진면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소전의 풍격을 고찰하는 데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된다.

소전을 진전(秦篆), 당전(唐篆), 철선전(鐵線篆), 옥저전(玉箸篆) 등으로도 부른다. 진전과 당전은 시대를 기준으로 부르는 명칭이고, 철선전과 옥저전은 형태의 특징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진전은 진나라이사가 쓴 진시황순수비의 전서 글씨를 말하고, 당전은 당나라이양빙(李陽氷)의 소전체를 가리킨다. 이양빙은 이사의 소전을 깊이 공부하여 법도를 터득한 다음 좀 더 가늘면서 단단하고, 둥글면서 매끈한 필획으로 변화시켰다.

철선전과 옥저전은 소전의 다른 이름으로, 소전의 자형에 필획이 철사나 옥젓가락처럼 단단하고 골기(骨氣)가 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철선전은 필획이 쇠[鐵]처럼 강하고 실[線]처럼 가는 소전체를 말하는데, 철선초(鐵線草)라는 식물의 잎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양빙의 「겸괘비(謙卦碑)」가 전형적인 철선전의 풍격이다. 옥저전은 소전의 필획이 옥젓가락처럼 단단하고 매끈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전의 필획 가운데 필획이 상대적으로 가는 것을 철선전이라 하고, 좀 굵은 것을 옥저전이라고 부른다.

소전의 특징은, 첫째, 한자는 본래 그림과 함께 생긴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도화성(圖畵性)이 강했으나 소전이 되면서 필획의 굵기가 같은 추상적 선형으로 고정되었다. 둘째, 굵기가 일정한 필획이 수평과 수직을 이루고, 필획 간의 간격이 고르고 글자의 형태가 직사각형이면서 길이가 가지런한 결구로 되었다. 셋째, 필획이 추상적 선형으로 굳어지면서 자형결구가 또한 정형화되었다. 상형성(象形性)이 약화되어 자체에서 볼 수 있는 객관 사물을 인식하는 표의성(表意性)이 탈각되기 시작하였다.

변천

소전은 지나치게 엄격한 필획과 결구로 인해 진나라에서 공식 서체로 쓰다가 이후에는 비액(碑額)이나 제자(題字), 인장(印章) 문자 등에만 쓰이면서 급격히 쇠퇴하였다. 당나라의 이양빙이나 송나라의 서현(徐鉉)·서개(徐鍇), 명나라의 이동양(李東陽) 등이 소전에 능했으나 엄격한 법도에서 많이 벗어났다. 청나라 시대에 고증학의 기풍으로 인하여 고대 문자인 전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왕주(王澍), 전점(錢坫), 등석여(鄧石如), 양기손(楊沂孫) 등이 소전체에 능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전은 비갈에 쓰고, 소전을 도서의 표제로 쓰도록 규정한 기록이 있지만(『세종실록』 22년 1월 10일), 대부분 비갈의 머리글자[碑額]는 소전을 썼다. 우리나라에서 소전체에 능한 사람으로는 고려 시대의 탄연(坦然)·이암(李嵓)이 있고, 조선 시대에는 김상용(金尙容)·이정영(李正英)·이한진(李漢鎭) 등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 閔祥德, 대구서학회 편역, 『서예란 무엇인가』, 중문출판사, 1992.
  • 楊震方 外, 곽노봉 역, 『中國書藝80題:書藝 및 篆刻入門』, 동문선, 1995.
  • 黃德寬·陳秉新[共著]·河永三 譯, 『漢語文字學史』, 동문선, 2000.
  • 陶明君, 『中國書論辭典』, 湖南美術出版社, 2001.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 書譜出版社, 1985.
  • 周俊杰 等, 『書法知識千題』, 河南美術出版社, 1991.
  • 許愼, 『說文解字』, 中華書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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