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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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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섬라곡국 |
한글표제 | 섬라곡국 |
한자표제 | 暹羅斛國 |
상위어 | 남만(南蠻), 남번(南藩), 동남아시아(東南亞細亞) |
동의어 | 섬라(暹羅) |
관련어 | 안남(安南), 향산오(香山澳), 대만(臺灣), 박다(博多) |
분야 | 용어해설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동남아시아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섬라곡국(暹羅斛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6월 16일 |
조선시대 태국을 지칭하던 용어.
개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섬라곡국에서 정사 나공(奈工) 등 일행 8명이 와서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면서 우리나라와 동남아 사이에 공식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조선초기에도 이어졌다. 조선초기 조선에 내빙한 동남아시아 국가는 섬라곡국을 위시하여 조와국(爪蛙國), 구변국(久邊國) 등 세 나라였다. 이 중에서 조선초기에 제일 먼저 사신을 보낸 나라는 지금의 태국인 섬라곡국이었다. 당시 섬라곡국 사신이 조선에 올 때는 직항로보다 주로 일본을 경유하였는데 왜구의 약탈이 심했기에 조선초기의 사절 이후에는 더 이상 내빙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전근대 동양사회에서는 오늘날 동남아시아에 해당하는 국가들을 총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한편 당송대에는 현재의 아라비아에 해당하는 대식국(大食國)도 남만에 포함되었고, 명대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서양 국가들에 대하여도 남만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경유해서 내항하거나 무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은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였고 일본은 남북조 시대였다. 이런 혼란기를 틈타 동아시아에는 해양 세력들이 성장하였으며 동남아시아의 해상교통은 활기를 띠었다. 왜구가 극성을 부렸던 것도 이 시기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유구의 상인들은 명의 해금정책이라는 조건하에 중국, 조선, 일본에 남방물산을 교역하거나 혹은 중계무역을 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에 접근하면서 통교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동남아 국가들이 조선으로 오는 항해로(航海路)를 보면, 해류와 바람에 순응하여 각기 본국으로부터 안남-남지나해-향산오(香山澳, [마카오])·광동·천주(泉州) 혹은 대만-대만해협-팽호도-유구-일본의 박다(博多)라는 항로를 거쳐 조선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동남아 국가들의 항해기술이나 배의 성능을 고려할 때 직접 조선까지 오는 경우보다는 유구나 일본의 박다를 경유하면서 그들을 통해 중계무역을 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역사기록상 동남아시아 국가 사절이 최초로 내빙한 것은 고려말이었다. 1391년에 섬라곡국에서 정사 나공 등 일행 8명이 와서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국서에는 성명과 봉인(封印)이 없어 진위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래서 국서는 접수하지 않고 사신의 인견만을 허락하였다. 3중의 통역을 거쳐 겨우 의사소통이 되었는데, 태국의 사신은 3년 전에 왕명을 받아 출발하여 일본에 1년간 체류하다 고려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 제일 먼저 사신을 보낸 나라는 태국인 섬라곡국이었다. 1393년 6월 섬라곡국의 사신 장사도(張思道) 일행 20명이 와서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 2명을 진헌하였다(『태조실록』 2년 6월 16일). 조선 정부는 이들 일행이 머무르는 동안 후한 접대를 하였으며, 장사도에게는 예빈경(禮賓卿), 동행한 조와국인 진언상(陳彦祥)에게는 서운부정(書雲副正) 등 종3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남아에서 온 이 최초의 손님에 대해 조선에서는 회례사(回禮使)로 예빈소경배후와 통사이자영을 보냈다. 섬라곡국에서는 1396년(태조 5) 조선의 회례사를 환송하면서 다시 사신 임득장(林得章)을 함께 파견하였다. 배후와 임득장 일행은 귀국하던 도중 전라도 나주 앞바다에서 왜구를 만나 습격당하였고, 통사 이자영이 일본에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397년 4월에는 조선에서 돌아가던 섬라곡국 사신 임득장 일행이 다시 왜구에게 피습당하였다. 예물은 약탈당하고 일행 중 6명만 살아 돌아가게 되자 조선에서는 의복 등을 주면서 위로하였다. 당시 섬라곡국 사신이 조선에 올 때는 직항로보다 주로 일본을 경유하였는데, 당시 왜구의 약탈이 심하여 조선초기의 이 두 번 사절 이후에는 더 이상 내빙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서세동점과 문호개방-, 탐구당, 2000.
- 정면, 「‘南蠻’ 및 ‘海南’ 諸國과 隋唐代 중국의 국제관계」, 『동북아역사논총』35, 동북아역사재단, 2012.
- 하우봉,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하우봉, 「유구와의 관계」, 『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하우봉, 「일본과의 관계」, 『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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