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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도성의 서쪽 지역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

개설

교(郊)는 도성의 외곽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까우면 50리(약 20km) 이내, 멀어도 100리 이내의 지역을 가리켰다. 서교(西郊)는 이러한 교 지역의 서쪽 공간을 말한다. 도성의 서교는 행정구역으로 고양, 파주, 교하, 통진, 인천 등을 아우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서교는 조선초기부터 매 사냥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다 점차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외교 의례의 공간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중국에서 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성의 서쪽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는 간혹 군사 훈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나 효종대 이후가 되면 제사를 위한 의례 공간이나 상품 교환을 위한 경제 활동 공간으로 그 이용 영역이 확대되었다.

내용 및 특징

도시 주변에는 도시적 요소와 농촌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의 중간지대를 보통 교(郊)라고 한다. 교는 대개 거리에 따라서 근교(近郊)와 원교(遠郊)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근교 지역은 대개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포함하여 도성으로부터 50리 이내에 들어가는 지역을 가리켰다.

서교의 근교는 오늘날의 양천, 김포, 고양 등이 해당된다. 원교 지역은 50리에서 100리 이내의 지역을 가리켰는데, 서교의 원교는 인천, 부평, 통진, 교하, 파주 등이 해당된다.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교 지역은 대체로 의례적 공간이 많았으나, 서교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사 의식을 위한 공간이 거의 없었다. 서교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제외하고 사당(祠堂)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대신 중국과 관련된 의식이 자주 거행되었다. 홍제원(弘濟院) 남쪽의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중에 전사한 명나라 군병을 위한 제사를 거행하던 곳이었다. 또한 서교에서는 중국 사신에 대한 영송(迎送) 행사가 많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의 영접 행사는 중국에 대한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의 하나였다. 중국의 사신이 도성에 들어올 때에는 세자나 영상 등이 홍제원까지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교영의(郊迎儀)를 특별히 행하였다. 이 의식을 마치면 사신은 서교에 자리 잡은 모화관(慕華館)에서 쉬고 숭례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서교에는 왕릉 행차도 이뤄졌다. 서교에는 고양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을 비롯하여 4개의 왕릉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들 왕릉에 행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교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명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으로서 서교가 많이 언급되었다. 1403년(태종 3) 1월 요동의 천호(千戶)인 왕득명(王得命)과 백호(百戶)인 왕미실첩(王迷失帖) 등이 칙서(勅書)를 가지고 오자 태종은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교에 나가 사신들을 맞이하고 대궐로 돌아왔다(『태종실록』 3년 1월 13일). 그리고 이들이 명나라로 돌아가려 할 때에 푸짐하게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전송(餞送)한 공간도 서교였다.

한편 서교는 매 사냥을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408년(태종 8) 태종은 서교에 나아가 매 사냥을 구경하기도 하고 직접 사냥을 즐기기도 하였으며, 매 사냥을 통해 잡은 고기로 직접 연향(宴享)을 베풀기도 하였다.

세종 또한 태종과 같이 매 사냥을 구경하기도 하였지만, 태종과는 달리 한 해의 농사 작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공간으로 서교를 이용하였다. 세종은 직접 서교에 나아가 농부들을 위로하면서 음식과 술을 하사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0년 윤4월 2일). 세종은 농사 작황을 확인하는 일을 거의 매년 빼놓지 않고 시행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서교는 군사 훈련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1625년(인조 3) 4월 왕은 서교에 행차하고 관무재(觀武才)를 실시하였다. 당시 서교에서 진행된 군사 훈련에는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추(騎芻), 편곤수(鞭棍手), 쌍검수(雙劍手) 등의 다양한 기예들을 차례로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인조실록』 3년 4월 20일). 이후 인조 연간 서교는 열무(閱武)를 시행하거나 활쏘기 시험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심양으로 가는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효종대에는 병자호란 이후 동북아의 국제 질서가 다시 재편되면서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많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행사들이 서교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청나라 사신은 효종 즉위년을 시작으로 한 해에만 여러 차례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인조대와 달리 서교에서 군사 훈련을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숙종대에 이르면 의례의 공간으로 서교가 부각되었다. 1675년(숙종 1) 서교를 비롯하여 동교와 남교에 각각 신하들을 보내어 현종대 경신대기근으로 굶어 죽은 귀신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숙종실록』 1년 7월 21일). 1678년(숙종 4)에는 천연두로 죽은 자의 초빈(草殯)이 산에 가득 차자 이들에 대한 제사를 진행하였고 서교에 있었던 민충단(愍忠壇)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에는 서교 지역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교통로가 발달하고 장시가 지속적으로 개설되었다. 서교 지역이 한강 하구와 연결됨과 동시에 소비 시장으로 확대된 결과이다. 이를 통해 경기도 서북 지역과 서해안의 해산물이 도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중계 집적 공간으로 서교가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최동원, 「18~19세기 서교지역 상업발달과 장시의 동향」, 『조선시대사학보』43, 조선시대사학회, 2007.
  • 최영준, 「조선시대 한양의 郊지역 연구」, 『문화역사지리』1,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198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