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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8 기준 최신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여자 승려.

개설

여성 출가자인 사미니(沙彌尼)가 2년간의 식차마나(式叉摩那) 단계를 거친 뒤 구족계로 348계를 받고 비구니(比丘尼)가 된다. 사미니는 2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정신(淨身)을 점검하는 식차마나 단계를 거친 뒤, 구족계로 348계를 받고 비구니가 된다. 불교 최초의 비구니는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파사파제이다. 석가모니는 세 번의 간청에도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아난(阿難)의 간청에 결국 허락하였다. 석가모니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교단에 여성 출가자가 있으면 청정한 법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연원

비구니는 산스크리트어 ‘빅슈니(bhikṣuṇī)’의 음역어로, 걸사녀(乞士女)라고 번역한다. 어린 여승인 사미니는 20세가 되면 곧바로 구족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 2년 동안 식차마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는 어린 남자 승려인 사미가 20세가 되면 구족계를 받고 바로 비구가 되는 남자의 경우와 다르다. 식차마나가 지켜야 할 계율은 사근본계(四根本戒)와 육법계(六法戒)이다. 사근본계는 ① 음행하지 말 것, ② 도둑질하지 말 것, ③ 살생하지 말 것, ④ 허황된 말을 하지 말 것 등이다. 육법계는 ① 불순한 마음으로 남자와 몸을 맞대지 말 것, ② 남의 금전을 훔치지 말 것, ③ 축생의 목숨을 함부로 끊지 말 것, ④ 작은 거짓말도 하지 말 것, ⑤ 끼니때가 아니면 음식을 먹지 말 것, ⑥ 술을 마시지 말 것 등이다. 식차마나로 지내는 동안 허물이 없으면 구족계를 받고 정식으로 비구니가 된다. 비구니가 받아 지켜야 할 계율은 348계로, 비구가 받아 지켜야 할 250계보다 많다.

불교 최초의 비구니는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파사파제이다. 그녀는 석가모니가 고향인 카필라성에 오자 세 번이나 찾아가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석가모니가 바이살리의 중각 강당에 머무를 때 석가족 여인 500명과 함께 스스로 머리를 깎은 다음 황색 옷을 걸치고 찾아갔다. 이를 본 아난이 석가모니에게 다시 세 번을 간청하여 출가를 허락받았다.

불교 경전에서는 석가모니가 처음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출가한 사문은 청정한 계율을 닦고 세속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여인은 세속에 대한 애착이 강하므로 도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리고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법이 이 세상에 오래갈 수 없다. 그것은 잡초가 무성한 논밭에는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정에 여인이 많고 사내가 적으면 도둑이 들기 쉽듯이, 이 교단에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교법이 오래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석가모니는 출가 여성에게 특별히 경계해야 할 여덟 가지 조항을 일러 주고 이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를 비구니 팔경계(八敬戒)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출가한 지 100년이 된 비구니라도 바로 그날 계를 받은 비구에게 먼저 합장해야 한다. ②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는 안거를 해서는 안 된다. ③ 한 달에 두 번씩 비구 승단에 나아가 계율을 반성하고 설교를 들어야 한다. ④ 안거를 마친 뒤에는 비구들에게 나아가 안거 중의 잘못을 참회하고 의심난 일들은 물어야 한다. ⑤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는 대중의 처소에서 떠나 보름 동안 별거해야 한다. ⑥ 비구니가 되려는 자는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계를 받아야 한다. ⑦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 ⑧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

변천 및 내용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비구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신라법흥왕과 진흥왕의 비(妃)를 비롯한 여러 왕족들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점,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김흔의 부인 등 귀족 여성들이 남편의 사후 출가한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래 많은 비구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간 비구니들도 확인되며, 일본 최초의 비구니인 선신(善信)은 백제에서 유학했다고 한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여성 출가자의 수가 많아지고 비구니의 지위도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후기의 선승인 혜심(慧諶), 나옹(懶翁), 보우(普愚) 등의 비문에는 비구니들의 이름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는 여성 출가자의 수가 그만큼 많아지고 비구니에 대한 대우 또한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혜심 문하의 비구니들이 수선사(修禪社)의 하안거에 참가한 것으로 볼 때, 고려의 비구니들이 승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수행에도 적극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개경의 왕실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과 안일원은 왕실의 비빈이나 궁녀들이 선왕의 사후 출가하는 사찰이었다.

정업원과 안일원의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전기까지 정업원과 안일원은 창덕궁 바로 곁에 위치하고 있었다. 몇 번의 치폐 과정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 비구니원들은 왕실 여성들의 기도처로 꾸준히 이용되었다. 특히 명종초 문정왕후의 섭정기에는 정업원이 왕실 비빈들의 거처인 인수궁의 부속 불당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1년 7월 26일). 정업원의 주지는 왕실의 친인척이거나 선왕의 후궁 출신인 비구니가 대부분 도맡았다. 인조반정이 발발했을 당시 광해군의 측근이었던 김개시(金介屎)가 정업원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잡혔는데(『광해군일기(중초본)』 15년 3월 13일), 이로 볼 때 인조대까지 창덕궁 인근에 정업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비호하에 왕실비구니원이 계속 유지되기는 했지만, 성종대에 사승방(四僧房)을 제외한 비구니원이 철폐되고, 연산군대에 도성내 비구니사찰을 모두 철거하고 여승들을 모두 환속케 하는 등 수차례의 탄압을 거치면서 비구니사찰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탄 비구니원들이 전쟁 후에도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성 내 비구니들은 창덕궁 인근에 초막을 짓고 인수원, 자수원 등의 비구니원을 운영하면서 살아갔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종대에 혁파되면서(『현종실록』 2년 1월 5일), 비구니들은 모두 도성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사원경제가 피폐해지고 비구니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하락했지만, 비구니들은 승가의 교육 체계와 계맥을 유지하면서 근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갔다.

참고문헌

  • 와타나베 쇼코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샘터, 1994.
  • 이향순, 『비구니와 한국 문학』, 예문서원, 2008.
  • 전국비구니회 엮음,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Ⅰ·Ⅱ, 예문서원, 2007.
  • 김영미, 「고려시대 비구니의 활동과 사회적 지위」, 『한국문화연구』1, 2001.
  • 민명숙, 「동아시아의 비구니 교단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이정모(태원), 「초기 교단의 구성과 출가 및 구족계제도」, 『논문집』7, 중앙승가대학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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