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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7 기준 최신판



1713년 동래 금정산성을 수축할 때 승병이 머물렀던 사찰.

개설

범황사(梵皇寺)는 1713년(숙종 39) 동래 금정산성(金井山城)을 운영할 때 승려 300여 명이 머물렀던 사찰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범황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금정산성 수축과 관련이 있으면서 수백명의 승려가 거주할 수 있는 사찰로는 범어사(梵魚寺)가 있다. 그러므로 범어사를 범황사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 금정산성을 수축할 때 범어사 관련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내용 및 특징

(1) 범황사와 범어사의 관련성

범황사와 관련해서는 1713년에 동래의 금정산성 수축과 관련하여 『숙종실록』에만 등장할 뿐이고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실록에서 금정산성 안에 있는 두 사찰의 승려 수가 100여 명이고, 범황사 승려 역시 300여 명을 밑돌지 않아 산성의 승병 운용에 유리하다고 하였으므로(『숙종실록』 39년 8월 11일), 범황사의 규모가 크고 금정산성 안에 있지는 않지만 산성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금정산성과 가깝고 수백명의 승려가 거주했던 사찰로는 범어사 외에 없다. 이로 보면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관이 범어사를 범황사로 잘못 기록한 것 같다. 즉 ‘어(魚)’를 ‘황(皇)’으로 잘못 기록하여 범황사라고 썼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실제로 범황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면 그 규모로 볼 때 다른 기록에 등장했을 것이다.

(2) 범어사의 금정산성 관련 기록

범어사는 금정산성 수축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1675년(숙종 1)에 동래부 뒤에 금정산이 있고 금정산 뒤에 범어사가 있는데 성을 쌓기 알맞은 곳이라고 하였고(『숙종실록』 1년 2월 6일), 1705년(숙종 31)에는 동래부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 범어사는 성을 쌓기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형편이 여기보다 나은 데가 없다고 하였다(『숙종실록』 31년 2월 21일). 그리고 1719년(숙종 45)에도 변경을 튼튼히 하기 위해 동래범어사의 옛 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숙종실록』 45년 3월 27일).

참고문헌

  • 한국불교연구원, 『범어사』, 일지사,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