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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6 기준 최신판



지평에서 수직으로 측정한 천구의 북극 앙각.

개설

지구 자전축의 북극이 향하는 방향인 천구의 북극까지 정북(正北)의 지평선에서 수직으로 측정한 앙각(仰角)을 뜻한다. 북극고(北極高) 또는 북극출지(北極出地)라고도 부르며, 관측지의 위도(緯度)와 같다.

내용 및 특징

북극고도는 관측지의 위도와 일치한다. 이 값에 따라 밤과 낮의 길이가 달라지고,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달라진다. 또한 일식을 계산할 때, 식의 진행 시각과 식분(食分)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 수치는 역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측정되어야 하는 수치 가운데 하나이다.

『국조역상고』에 따르면, 세종 초기에 역법 계산을 담당하던 관리인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이무림(李茂林)을 마니산, 백두산, 한라산에 파견하여 북극고도를 측정했음이 『관상감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관측치는 당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운관선생안』이나 『삼력청선생안』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사실 여부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

『세조실록』에 나오는 이순지(李純之)의 졸기(卒記)에 따르면, “세종이 문신(文臣)을 뽑아서 산법(算法)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이순지가 북극출지를 계산해보더니 38도강(度强), 즉 38+1/12도(度)라고 하자 세종이 이를 의심하였다가 때마침 중국 조정에서 온 사람이 『역서(曆書)』를 바쳤는데 거기에 고려의 북극출지가 38도강이라고 되어 있었으므로, 세종이 크게 기뻐하고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도록 명하였다”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이 기록을 근거로 조선초에는 한양의 북극출지가 38도강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원사(元史)』「천문지(天文志)」에는 고려의 북극출지가 38도소(度少), 즉 38+1/4도라고 적혀 있다.

세종이 의상, 즉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라고 명한 것은 1432년(세종 14)의 일이다. 세종은 북극고도를 정확하게 측정해야만 다른 관측기구들을 만들 수 있음을 인식하고 맨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라고 구체적으로 명했다. 이에 따라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는 옛 제도를 연구하고 이천(李蕆)이 공사를 감독하여, 먼저 나무로 본을 만들어 북극출지를 측정하였더니 38도소로 측정되었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이 값은 『원사』「천문지」의 값과 일치한다. 이러한 측정치를 바탕으로 한양 기준의 주야 시각, 절기 시각, 일출몰 시각 등을 구현한 『칠정산』이 편찬되었다.

『국조역상고』에 따르면, 1713년(숙종 39)에 청나라 사신 하국주(何國柱)가 한양을 방문하여 종로에다 대형 상한의(象限儀)를 설치하고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 39′ 15″를 얻었다. 이 관측치가 청나라의 『역상고성』에 이 실측값으로 수록되었다. 정조 때 김영(金泳)이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신법누주통의(新法漏籌通義)』를 계산할 때도 이 북극고도 값을 사용하였다(『정조실록』 13년 8월 21일). 또한, 조선후기의 유물인 앙부일구(仰釜日晷), 간평일구(簡平日晷), 혼개일구(渾蓋日晷) 등의 해시계를 제작할 때에도 이 수치가 사용되었다.

북극출지가 관측지에 따라 다르며, 이 때문에 주야 시각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인식은 실록에 나오는 서명응(徐命膺)의 답변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영조와 토론하던 중에 “북극출지는 매 250리마다 1도씩 차이가 나며, 주야 시각의 차이가 이것 때문에 발생한다. 한양의 북극출지는 38도이므로, 한양 이북에서는 250리마다 1도씩 더하므로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땅에서는 40도 정도가 되고, 이곳에서는 하지(夏至) 때 낮이 지극히 길어서 60각이 된다. 한양 이남에서는 매 250리마다 1도씩 감해야 하는데,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의 땅에서는 북극출지가 30도가 되어, 이곳은 하지에 낮이 가장 길 때 45각(刻)이 된다”고 답하고 있다(『영조실록』 36년 12월 7일).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서호수(徐浩修)는 1791년(정조 15)에는 이 한양의 북극고도 값을 기준으로 하여 『팔도여도(八道輿圖)』에서 측정한 거리에 대한 비율로 팔도의 관찰사 감영 소재지의 북극고도와 절기 시각을 계산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11일).

변천

조선초기 1437년(세종 19)에 간의로 측정한 결과 한양의 북극고도는 38도소 즉 38+1/4도(度)로 측정되었다. 이 값은 원주를 365+1/4도로 정의할 때의 수치이며, 『원사』「천문지」에 고려 북극출지로 기록되어 있는 값과 일치하였다. 조선후기에는 1713년에 청나라의 하국주가 한양의 종로에서 측정한 37∘ 39′ 15″가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사제역상고성(卸製厯象考成)』
  • 『운관선생안(雲觀先生案)』
  • 『삼역청선생안(三曆廳先生案)』
  • 『원사(元史)』
  • 『원사류편(元史類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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