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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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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부곡 |
한글표제 | 부곡 |
한자표제 | 部曲 |
관련어 | 향(鄕), 소(所) |
분야 | 사회/향촌/취락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김현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부곡(部曲)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8월 20일, 『태조실록』 2년 3월 24일, 『태종실록』 3년 윤11월 19일, 『태종실록』 14년 7월 4일, 『세종실록』 22년 4월 15일, 『세종실록』 25년 12월 9일 |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존속했던,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
개설
부곡(部曲)은 고려시대에 널리 존재했던 특수 계층이 거주하던 행정 구역이다. 부곡이라는 명칭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존재하였지만 우리나라와는 그 용례가 달랐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부곡을 고려시대와 같은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나오지만, 그것은 16세기까지만 나타난다.
내용 및 특징
부곡이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고려시대에 한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부곡 이외에도 소(所)·처(處)·장(莊) 등 특수한 집단이 거주하는 행정 구역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행정 구역은 고려시대 군현제의 하부 구조로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려시대 부곡은 신라말 고려초에 후삼국 통합 전쟁 가운데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태조실록』에서도 고려 왕조 때 5도양계의 역자(驛子), 진척(津尺), 부곡(部曲)의 주민은 고려 태조 때 명을 어긴 자들로서 모두 천한 역(役)을 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태조실록』 1년 8월 20일).
조선시대의 부곡은 고려시대의 제도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던 것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지역의 향리들이 자율적으로 지배하는 임내(任內) 지역을 의미하였다. 조선초기에는 태조가 새로 수도로 정했던 계룡산 지역의 근기(近畿) 지역으로 81개의 주현과 부곡 등을 획정하였다든가(『태조실록』 2년 3월 24일), 왕실이나 권력자의 출신 지역이어서 부곡 지역이 감무(監務)가 파견되는 지역으로 강제로 승격되었다든가(『태종실록』 3년 윤11월 19일), 고려시대의 지방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지방 제도를 기획하는 데 전 왕조의 유제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임내 지역을 향·소와 함께 언급한다든가 하는 사례들이 있다(『태종실록』 14년 7월 4일).
한편 부곡은 각 군현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출신지를 말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구역 명칭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종대에 종실녀(宗室女)의 관제를 제정한다든가(『세종실록』 22년 4월 15일), 종실의 관작을 제정할 때에 그들의 관작을 출신 지역 명칭인 군현이나 부곡의 명칭으로 칭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5년 12월 9일).
변천
부곡은 『삼국사기』「지리지」에 "향·부곡 등의 잡소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所謂鄕所部曲等雜所 不復具錄]"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부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조선전기의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여주목(驪州牧)」 고적조(古跡條)에 있는 등신장(登神莊)에 관한 기록에서 나온다.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 (중략) 여기에는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있다."하여,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인구나 토지가 군이나 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음을 말해 준다.
삼국시대의 부곡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부곡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풍부하게 나오고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부곡의 명칭과 위치 등이 충실하게 실려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분석에 의하면,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 남부 지역에 부곡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중부 이북 지역은 분포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고려 왕조는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왕조에 저항한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부곡민으로 편성하였다.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편성하여 계층적 군현제의 하부 기구로 예속시키고, 군현제를 통해 간접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부곡은 거의 소멸하게 되어,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된 1454년까지 존속하고 있던 부곡은 68개 소였다. 나아가 16세기 전반인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무렵에는 14개 소만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 림건상, 『조선의 부곡제에 관한 연구』, 평양: 과학원출판사, 1963.
- 김용덕, 「향·소·부곡고」, 『용재백낙준박사환갑기념국학논총』, 1955.
- 박종기, 「고려후기 부곡제의 소멸과 그 원인」, 『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97.
- 김용덕, 「부곡의 규모 및 부곡인의 신분에 대하여(上)」, 『역사학보』88, 1980.
- 김용덕, 「부곡의 규모 및 부곡인의 신분에 대하여(下)」, 『역사학보』89, 1981.
- 박종기, 「고려 부곡제의 구조와 성격: 수취 체계의 운영을 중심으로」, 『한국사론』10, 1984.
- 이광우·이수환, 「16~17세기 경상도 자인현 복현(復縣) 과정과 이를 둘러싼 자인(慈仁)·경주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 『고문서연구』41, 2012.
- 이우성, 「고려 말기 나주목 거평부곡에 대하여: 정도전의 적거(謫居) 생활을 통해 본 부곡의 내부 관계」, 『진단학보』29·30,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