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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밭에서 논으로 바뀐 경지나 논에서 밭으로 바뀐 경지를 일컬음.

내용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은 논농사에서 이앙법(移秧法)이, 밭농사에서 견종법(畎種法)이 일반화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논농사의 경우 후기 들어서 관개수리 시설이 확충되고 봄 가뭄 속에서도 이앙할 모를 키우는 건앙법(乾秧法)이 자리 잡으면서 이앙법이 직파법(直播法)을 밀어냈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하여 제초 노동력을 크게 줄였을 뿐만 아니라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크게 증가시켰다. 게다가 가을에 파종하여 6월에 수확하던 가을보리와 5월에 파종하여 가을에 수확하던 벼가 이앙법을 통해서 같은 논에서 재배될 수 있었다. 논의 이모작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농촌에서는 밭을 논으로 만드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논은 토지대장에 번답[反畓]으로 등록되었다. 서유구(徐有榘)가 『임원경제지』에서 전국 논의 1/3이 번답이라고 지적할 만큼 조선후기 번답은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한편 밭농사의 견종법은 이랑과 고랑을 깊게 하여 알맞은 작물을 고랑에 파종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을 말하였다. 밭농사의 견종법은 16세기 이후부터 높은 이랑을 만들어 주는 볏이 달린 쟁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가능하였다. 이로써 밭작물의 작부 체계가 크게 발전하여 지역에 따라 1년 2작, 2년 3작의 윤작 체계가 확립되었다. 밭농사 기술의 발달은 보리·밀·콩 등의 작물 지배에서 생산성을 높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당시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한편으로 논을 밭으로 바꾸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밭은 토지대장에 번전(反田)으로 등록되었다.

용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번답·번전의 용례로서 1820년(순조 20) 경상감사 김이재(金履載)가 정부에 올린 양전사목(量田事目)에 관한 기사를 들 수 있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양전 때 밭이던 것이 지금 논이 된 것과 옛 양전 때 논이던 것이 밭이 된 것은, 바로 지금의 번답·번전이다. 계속 경작할 수 있는데도 바꾸지 않는 것은 모두 원전(元田)과 원답(元畓)으로 시행한다. 경자양전 때 밭의 토질이 비록 기름지더라도 모두 3·4등에 이르지 않은 것은 대체로 밭의 수입이 논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밭을 논으로 만든 뒤에는 이전에 측량한 등급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일체 토질에 따라 올리거나 낮춘다. 논이 밭으로 바뀐 것에서는 역시 토질에 따라 등급을 정하되, 그 가운데 수원(水源)이 얕고 짧아서 논이나 밭으로 변하여 일정하지 않는 것은, 영구히 원답에 속하기가 어려우니 우선 번전이나 번답으로 기록해 둔다.” 이 가운데 “계속 경작할 수 있는데도 바꾸지 않는 것은 모두 원전과 원답으로 시행한다.”는 부분은 조선후기의 번전과 번답의 다수가 조선전기에 척박하여 불안정하게 경작하던 속전(續田)에서 발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 『농사직설(農事直說)』
  • 『농가집성(農家集成』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 일조각, 1971.
  • 민성기, 『조선 농업사 연구』, 일조각,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