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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백제의자왕의 아우 도천군의 원당으로 전해지는, 부여 소재의 절.

개설

부여에 소재해 있는 도천사(道泉寺)는 백제의자왕의 아우인 도천군(道泉君)의 원당(願堂)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임진년의 왜란이 소강상태이던 1596년에 이몽학(李夢鶴)이 무리를 이끌고 도천사에서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도천사 승려 대부분이 반란에 가담하였고, 일부는 관청에 고변(告變)하려다가 살해되었다. 정조대에는 도천사의 준시(蹲柹), 즉 곶감 공납이 과도하다는 충청감사정존중(鄭存中)의 건의에 따라 준시 공납을 면제해 주었다.

내용 및 변천

부여 서쪽 취령(鷲嶺) 북쪽의 천애산(天涯山) 아래에 있던 도천사는 백제시대에 건립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세(寺勢)를 유지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과 관련해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조선시대부터 나타난다. 1596년(선조 29) 7월에 이몽학(李夢鶴)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천사에서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다(『선조실록』 29년 7월 29일). 이때 도천사 승려들 대부분이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승려 설미(雪眉)는 그 사실을 관군에 알리려다가 살해당하였다(『선조실록』 29년 8월 25일). 이몽학이 처음에 600여 명의 군사로 난을 일으켰는데 관리였던 한현(韓絢)이 반란군에 가담하고 여러 고을을 거치면서 그 무리가 수만명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승려 능운(能云)도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반란군은 사족, 서얼 출신, 승려에 이르기까지 넓은 계층의 세력을 확보했으나, 결국 홍주목사홍가신(洪可臣)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반란이 일어난 지 1년 후인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는 일본이 다시 침략하여 호남 지역으로 쳐들어왔는데, 부여 도천사, 홍산(鴻山)무량사(無量寺), 은산역(恩山驛) 등지에서 분탕질 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이때 도천사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 같다. 정언충(鄭彦忠)이 쓴 「도천사사적비문(道泉寺事蹟碑文)」에 의하면, 도천사는 정유재란 때 거의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에 승려 송운(松韻)과 상주(尙珠)가 동서 익랑(翼廊)을 중건하였고, 그로부터 40년 후에 모암(茅庵), 중암(中庵), 죽림암(竹林庵), 원적암(圓寂庵)이 중건되었다. 이 네 암자는 정인지(鄭麟趾)가 전답을 시주하였던 곳이어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도천사 네 암자는 정인지의 위축원당(爲祝願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대에는 충청감사정존중(鄭存中)이 왕에게 사찰 공납(貢納)의 폐단을 말하는 가운데 부여 도천사와 정산(定山)정혜사(定惠寺)에서 준시를 진상하는 일이 과도하다고 아뢰었다(『정조실록』 15년 1월 28일).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난 4월 30일에 비변사(備邊司)에서 도천사와 정혜사의 공납에 대해, 도천사의 상납은 원봉(元封) 65두(斗)에 2,000개로 정하며 색락(色落) 정채(情債)는 1,000개로 정하고, 정혜사의 상납은 원봉 51두에 1,500개로 정하며 색락 정채는 800개로 정하여 임금에게 아뢰자, 왕이 윤허하면서 준시 공납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도천사사적비문(道泉寺事蹟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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