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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역마를 기르고 유지하기 위한 재원으로 각 역에게 분급된 토지.

개설

역(驛)은 국가가 지방 통제 및 통신과 물류를 위해 설치한 육상 교통망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약 540여 개의 역이 존재하였다. 각 역에는 통신 및 물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말을 기르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이때 각 역마다 필요한 말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급한 것이 마전(馬田)이었다. 마전은 고려말의 기록에도 그 명칭이 나타나 이미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 상의 마전 지급액은 1마리당 큰 말은 7결, 중간 크기의 말은 5결 50부, 작은 말은 4결로 규정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마전의 지급은 고려말 전제개혁 당시에도 언급되고 있어 이미 고려후기부터 이루어져 온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지급액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예종대 기록에 의하면, 과거에는 마전 지급 액수가 상등의 경우는 9결, 중등의 경우는 7결, 하등의 경우는 5결이었는데 예종 당시에는 상등 7결, 중등 5결, 하등 4결만 지급하여 불편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예종실록』 1년 윤2월 24일). 예종 당시 지급 액수는 『경국대전』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이후 법전들에도 그 규정에는 변화가 없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동일한 액수가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마전은 조세를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분급한 토지가 아니라 실제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전세도 면제해 주는 자경무세전(自耕無稅田)이었다. 각 역에서 실제 말을 길러 바치는[立馬] 자가 마전을 경작하여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평안도의 경우에는 향리들이 1년씩 돌아가며 입마를 담당하기도 하였고(『성종실록』 6년 12월 4일), 역리들이 마위전을 버리고 도망갔을 경우에는 자원하는 자가 이를 대신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4년 5월 10일). 그러나 마전의 지급에도 불구하고 입마역은 고역에 해당하였다. 이 때문에 역로가 잔폐(殘廢)해지는 폐단이 자주 발생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여러 차례 논의되었다.

변천

조선후기 들어서면 마전을 경작하던 자들이 이를 팔아먹기도 하고(『정조실록』 11년 1월 19일), 혹은 타인에게 대여하여 병작반수로 운영하는 관행이 생겨나는 등(『정조실록』 7년 10월 15일) 운영상의 여러 폐해가 발생하였다. 또 역에 소속된 마전이 권세가에 의해 점탈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다. 국가에서는 마전과 관련된 불법적 폐단들을 계속 적발하여 시정조치를 취함으로써 역로의 원활한 운영을 모색하였다.

참고문헌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마사박물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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