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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문과의 공정한 채점을 위해서 시권에 써 놓는 일종의 표식.

개설

조선시대에는 문과의 시험 답안지를 공정하게 채점하기 위하여 응시생의 신원 정보를 기록한 피봉(皮封)과 답안 제술문(製述文)을 분리한 뒤 답안지만으로 채점을 하였다. 감합(勘合)은 피봉과 제술문을 분리하기 직전에 양쪽에 걸쳐 자호(字號)를 써 두었다가 채점 뒤 급제자의 제술문을 피봉과 합하여 같은 시권(試券)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표식이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문과의 경우에 시험 답안지를 공정하게 채점하기 위해서 고려시대에 도입된 봉미법(封彌法)과 역서법(易書法)을 시행하였는데, 감합은 이 두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응시생은 원서를 접수하는 녹명(錄名) 단계에서 응시자 및 그 부(父), 조(祖), 증조(曾祖), 외조(外祖)의 관직과 성명·본관·거주지를 기록한 사조단자(四祖單子), 응시자의 신분을 보증하는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하여 응시 자격을 확인받는 한편 시지(試紙)를 미리 구입하여 피봉(皮封)을 만들었다가 녹명소의 관리에게 도장을 받았다. 피봉은 비봉(秘封)이라도 부르는데, 시지의 앞머리 부분에 자신의 관직·성명·연령·본관, 주소와 부·조·증조·외조의 관직, 성명·본관을 5행으로 쓴 뒤, 그 위에 풀로 종이를 붙여 봉하고, 상·중·하 3곳에 근봉(謹封)이라고 써 넣었다.

응시자가 시권(試券)을 제출하면 답안지를 거두는 수권관(收卷官)과 군졸(軍卒) 몇 명은 시권을 제출한 순서대로 대상(臺上)에 쌓아 두었다가 시험 시간이 끝나면 100장씩 축(軸)을 만들어 천자문(千字文)에 따라 자호(字號)를 매겼다. 그러면, 초시와 복시에서는 타인관(打印官), 전시에서는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각각 시폭(試幅)을 연결한 곳, 먹물로 이름을 지웠거나 글자를 첨가한 곳에 모두 도장을 찍어 등록관(謄錄官)에게 넘기었다. 등록관은 과거 시험 후 시험지를 옮겨 쓰던 관원이었다.

답안지에 확인 도장을 찍는 타인관으로부터 시지를 넘겨받은 등록관은 피봉과 제술문(製述文) 양편에 각각 자호를 써 놓고, 자호로써 양편에 걸쳐서 감합을 해 두었다. 그 뒤 등록관은 피봉과 제술문을 분할하고 나서, 피봉은 봉미관에게 주어 피봉을 넣어 두는 궤짝인 봉미궤(封彌櫃)에 넣어 다른 곳에 보관하게 하고, 제술문은 등록소에 보내 서사리(書寫吏) 30∼50명을 동원하여 붉은 글씨로 옮겨 적는데, 이것을 등서(謄書) 또는 역서(易書)라 하였다. 역서가 끝나면 원 시험지인 본초(本草)와 옮겨 적은 주초(朱草)는 사동관(査同官)과 지동관(枝同官)에게 넘겨져 사동관은 본초를 읽고, 지동관은 주초를 보면서 잘못 옮긴 것이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였다. 대조 확인이 끝나면 본초는 따로 보관하고, 주초만을 시관에게 보내 채점하게 하는데, 이때 시관은 의문점이 있어도 직접 본초를 가져다 볼 수 없게 하였다.

고시관의 채점이 끝나면 감시관이 합격한 시권의 주초와 본초를 대조한 뒤, 봉미관이 봉미궤를 열어 합격한 시권의 피봉을 골라 그 피봉을 뜯고 그 속의 응시생과 사조(四祖)의 성명이 있는 부분을 본초에 붙였다(『중종실록』 9년 9월 10일). 이때 피봉과 제술문이 하나로 합쳐지고 분리되었던 자호가 비로소 하나로 합쳐지면서 합격한 제술문의 주인공이 확인되었다. 그러면 봉미관이 본초에는 점수, 주초에는 성명을 각각 기입한 뒤에 곧바로 성적 순위를 매기고, 방(榜)을 써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개정증보판), 집문당, 1994.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차미희,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유생의 삶』,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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