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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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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개시 |
한글표제 | 개시 |
한자표제 | 開市 |
관련어 | 회동관개시(會同館開市), 책문개시(柵門開市), 중강개시(中江開市), 북관개시(北關開市), 왜관개시(倭館開市) |
분야 | 경제/산업/상업·무역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철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개시(開市) |
외국과의 공식적인 교역.
개설
개시(開市)는 행위성과 공간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즉 시장을 연다는 뜻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외교상 공식 절차와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 접대와 교역의 행위를 말한다. 공간에 따라 회동관개시, 책문개시, 의주의 중강개시, 회령과 경원에서 열렸던 북관개시, 왜관개시 등 교역이 행해진 지역을 붙임으로써 구분한다.
내용 및 변천
조선조의 개시로써 가장 먼저 열린 것은 회동관개시였다. 조선 사행의 숙소인 북경 회동관에서 열린 교역은 중국예부에서 회동관 벽에 고시(告示)를 내걸고 관리를 임명하여 매매를 감독하며 교역 품목과 수량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시라는 용어는 중국과의 변경지역 그리고 왜관에서 이루어진 대외무역을 말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열린 개시는 압록강가 중강에서 열린 중강개시와 중강후시, 청과 조선의 실질적인 관문인 책문에서 조선 사행이 들어가고 나올 때 열린 책문개시와 책문후시가 있다. 이 밖에도 병자호란 뒤 청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북관개시가 있는데, 이는 회령과 경원에서 열린 개시를 말한다. 특히 북관개시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이익이 증가하면서 개시보다는 후시의 성격을 띠는 사시와 마시가 확대되었다. 대중국 관계에서 행해진 이상의 개시 이외에도 일본과 왜관에서 이루어진 왜관개시가 열려 19세기 까지 교역활동이 이루어졌다.
의의
개시를 개설할 당시에는 공무역으로서 그다지 큰 경제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사무역으로 발전하면서 상인의 자본축적과 국내경제 발전과 연결되었다. 대중국무역의 경우 조선정부는 사무역을 후시로 인식하여 불법화하였다. 그렇지만 후시는 사상(私商)의 성장으로 점차 합법화하기도 하였다. 결국 개시는 단순히 외교적 차원에서 열린 교역의 차원을 넘어 경제적 의미를 띠어가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승희,『조선후기 함경도 상업연구』, 국학자료원, 2003.
- 김동철,「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피집삼」『한국민족문화』13, 1999.
- 유승주·이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철성,『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朝鮮後期 對淸貿易史 硏究)』, 국학자료원, 2000.
- 정성일,『조선후기 대일무역(朝鮮後期 對日貿易)』, 신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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