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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청이 내몽골의 막남지구를 6맹 49기로 나누어 편제하고 몽골 수장을 기장(旗長)으로 임명하여 속민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한 제도.

개설

‘자사크(jasak, ǰasaɤ)’란 각 기(旗, hogšon)를 관할하는 수장을 의미하였다. 한자로는 찰살극(札薩克), 혹은 자살극(扎撒克)으로 표기되었다. 몽골어로 집정관(執政官)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사료에서는 집정버일러[執政貝勒]·자사크버일러[扎薩克貝勒] 등의 명칭으로 나타났다.

내자사크[內札薩克]는 청 왕조가 내몽골의 막남지구를 6맹(盟) 49기(旗)로 나누어 편제한 것을 가리켰다. 자사크제도는 청이 내몽골 각부의 유목지 경계를 정하고 기존의 몽골 수장을 기장(旗長), 즉 자사크로 임명해 속민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한 제도였다. 자사크가 관할하는 기를 자사크기(旗)라고 하는데 후금에 복속한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처음 건립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자사크제는 내·외몽골의 외번(外藩) 몽골과 함께 신강의 북로(北路)에서도 시행되었다. 자사크제도는 후금에 복속한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처음 건립되었다. 자사크라는 용어는 후금과 공동으로 군사행동을 할 때부터 등장하고 몽골 수장들 중에서 선발된 이들은 군사 동원과 전시 질서유지·금령에 대한 위반 행위를 처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자사크의 직무 수행은 후금 칸[汗]의 권위에 의하여 보장받았는데 이런 모습은 이후 청대 자사크기 수장으로서의 성격을 부분적으로나마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사크는 강희제(康熙帝) 연간에 가서는 49기로 증가하였는데, 이를 내(內)자사크기 혹은 내자사크몽골이라고도 불렀다. 이 제도는 나중에 칼카(외칼카) 등 다른 몽골에까지 확대 추진되어 외(外)자사크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자사크에 의하여 관할되지 않고 청조에 직속된 부락을 내속(內屬)몽골기라고 하여 자사크기와 구분하였다.

내몽골 자사크의 경우에는 대체로 유력 왕공들이 임명되었고 직계 후손이 세습하는 것도 가능하였지만 원칙적으로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고 청에 의하여 권한이 언제든지 회수될 수가 있었다. 등급은 칸, 친왕(親王), 군왕(郡王), 버일러[貝勒], 버이서[貝子] 등으로 모두 청 조정의 책봉을 받았고 작위가 있었으며, 현지의 변사대신(辨事大臣)이나 참찬대신(參贊大臣)의 통제를 받았다. 봉지 내의 산천, 하류, 산림, 목지, 전산(田産)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고, 정부에 대한 요역이나 세부(稅賦)의 부담이 없었다. 봉지 내의 인민은 자사크의 관할이었고 자사크에게 부세를 납부해야 했다. 자사크는 이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사신이 1785년에 건륭제(乾隆帝)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었을 때 연회에 참여하였는데, 내자사크인으로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70~90세 이상의 사람을 구분해서 상을 내리라는 건륭제의 지시를 조선에 전한 바 있다(『정조실록』 9년 2월 14일).

참고문헌

  • 이선애, 「외국(tulergi gurun)에서 외번(tulergi golo)으로-17세기 청-할하 관계-」 『명청사연구』 43, 2015.
  • 이선애, 「『청사고』 「식화지」 역주1」, 『중국사연구』 52, 2008.
  • 이선애, 「청 초기 외번(tulergi gole) 형성과정과 이번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