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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숙종 때 북한산성 내에 건립한 10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 중 하나.

개설

국령사(國靈寺)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북한산(北漢山) 대서문길에 있는 절이다. 국녕사(國寧寺)라고도 한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한 후 산성의 방어를 위해 성 안에 건립한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다. 1713년(숙종 39) 청철(淸徹)과 철선(徹禪)이 86칸 규모의 절로 창건하였다. 당시 국령사는 절과 인접한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현 가사당암문)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산의 의상봉(義湘峰)과 용출봉(龍出峰) 사이에 있는 산성의 성곽을 방비하였다.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승군제(僧軍制)의 폐지로 승영사찰은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는데, 국령사도 혼란기를 거치며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1990년대 말에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및 특징

북한산성은 승군이 주둔하며 산성의 방어를 효율적으로 담당했던 남한산성을 본 따서 1711년(숙종 37)에 계파성능(桂坡聖能)의 지휘 감독 하에 수축되었다. 산성이 완공된 후 성능은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아 30여 년간 머물면서 승군이 주둔할 승영사찰을 건립하고 이들을 지휘하였다. 당시 북한산성 내에는 기존에 있던 중흥사(重興寺) 외에 10개의 승영사찰이 건립되었고, 그 중 하나가 국령사였다.

1713년(숙종 39) 청철(淸徹)과 철선(徹禪)이 86칸의 큰 규모의 절로 국령사를 창건하였다. 국령사는 북한산의 의상봉(義湘峰, 502m)과 용출봉(龍出峰, 571m) 사이에 위치하여(『정조실록』 9년 6월 17일), 신라 때 의상(義湘)이 수행한 도량으로 전하기도 한다. 사찰명이 『정조실록』에는 국령사(國靈寺)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능(聖能)이 편찬한 『북한지(北漢誌)』에는 국녕사(國寧寺)로 기록돼 있다.

북한산성 내에 건립된 승영사찰은 일반 사찰과는 달리 산성의 성문(城門) 가까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주로 성곽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당시 국령사는 인접해 있던 청수동암문을 중심으로 하여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성곽을 방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국령사는 청수동암문의 방어 외에도 절 동쪽의 노적봉(露積峰) 기슭에 위치한 중성문(中城門) 일대의 방비도 함께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성에는 산성 내의 주요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 안에 또 하나의 성인 내성(內城)을 쌓고, 산성 방어를 위한 최후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이 중성의 성문(城門)에 해당하는 중성문이 있었고,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던 국령사가 중성문 일대를 방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령사는 청수동암문과 함께 산성 내의 중성을 방비한 막중한 책무를 띠었던 까닭에 그 사찰명도 국녕사(國寧寺)로 칭하게 된 듯하다.

국령사는 북한산성 내의 다른 사찰과 함께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한 승대장(僧大將)의 지휘 아래 전국의 사찰에서 소집된 의승군(義僧軍)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350여 명의 의승(義僧)이 의승입번제(義僧立番制)에 따라 매년 2개월씩 윤번(輪番)으로 사찰에 복무하였다. 전국의 사찰에 할당된 수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방위하는 이 제도는 지방 사찰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등 많은 폐단을 가져와 1756년(영조 32)에 폐지되었다. 대신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의해 번을 서지 않는 대가로 방번전(防番錢)을 10~22냥을 납부하면 산성 사찰에서 복무하는 것이 면제되었다. 이후 산성의 방위는 연간 17냥을 지급받는 방번승(防番僧)이 전담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의승의 방번전이 절감되는 조치가 내려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승군에 의한 사찰 운영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승군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변천

(1) 근대

조선후기의 승영사찰은 19세기 말 갑오개혁 때 승군의 해산과 함께 대부분 폐사되었는데, 국녕사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경준(申景濬)이 쓴 『가람고(伽藍攷)』에 국녕사가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까지는 절이 존립하였음이 분명하다.

(2) 현대기의 국녕사

갑오개혁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폐사된 국녕사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중창되었다고 하나, 1991년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이것을 능인선원(能仁禪院)이 1998년 10월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여 2004년에 중창 불사를 마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녕사에는 24m 크기의 국녕대불(國寧大佛)이 있고 그 주위에는 만불(萬佛)을 모신 만불전(萬佛殿)이 에워싸고 있다. 이와 함께 대웅전, 산신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현재 북한산 국녕사는 능인선원의 분원이다.

문화재

‘한월당대선사(漢月堂大禪師)’라는 명문이 새겨진 조선후기 양식의 사리탑이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攷)』
  • 『북한지(北漢誌)』
  • 김윤우, 『북한산의 역사지리(增補譯註 北漢誌)』, 범우사, 1996.
  •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편,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1·2,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12.
  • 이병두,『북한산성과 팔도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10.
  • 조면구,『북한산성』, 대원사, 1994.
  • 김상영, 「한국불교사에서 중흥사의 위상과 역할」,『전법학연구』2, 불광연구원, 2012.
  • 윤기엽, 「북한산성의 승영사찰」, 『국학연구』25, 한국국학진흥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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